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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생활자 Jun 20. 2020

그는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아버지에 대하여

'일간 이슬아 수필집'의 '43-44. 작업하는 당신'편을 보면 산업 잠수사로 일하는 이슬아 작가의 아버지, 웅이 이야기가 나온다. 깊은 바닷속 최소한 30미터를 수면 아래로 내려가서 지상에서 보내주는 호스 속의 공기를 마시며, 탁해서 보이지도 않는 바닷속에서 2시간 여를 작업한다고 했다. 물속에서 갑자기 산소가 끊길 수 있다는 공포는 물론, 깊은 바닷속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이슬아는 웅이에게 '어째서 그 힘든 일을 하냐'고 묻는다. 웅이는 '돈 때문이기도 하고, 능력이 닿는 일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슬아의 아버지 웅이는 그 일로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 같은 책의 '60-61. 마담과 다이버' 편에 보면 웅이와 복희(이슬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앙골라로 가서 산업 잠수사와 잠수사들을 위한 조리사로 일한다. 그 둘은 어린 자녀 둘을 한국에 두고, 그곳에서 목숨을 걸만큼 위험하고 힘든 일을 감수한다. 그리고 삼 개월 후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보수를 받지 못해 좌절한다.


흥미로운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달한 적이 있는데, 남편은 대뜸 '와, 그 사람 돈 많이 벌었겠다.'라며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며 당황스러웠다. 사실 이슬아 수필집을 읽으며 '웅이는 그렇게 힘든 일을 성실하고 열심히 잘 해냈는데, 도대체 왜 가난했나요.'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지금도 새벽 4시가 넘으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엄마가 전 날 해둔 반찬과 밥을 보온 도시락에 담아 집을 나선다. 열두 해를 5번 넘게 겪은 아버지지만, 생계의 고단함을 털어내기에 그 세월은 짧을 수도 있다. 집에서 가까운 대형 화물차 주차장에서 추레라에 시동을 걸고, 그 날의 일정을 시작한다. 새벽부터 철강회사 앞에 줄을 서고 대기하는 일이다. 그래서 1번이나 2번으로 짐을 부리면, 하루에 2건의 일을 할 수 있다. 간혹 철근들을 추레라에 올리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하는 일이다. 환갑이 넘은 아버지가 계시기에는 참 거칠기만 한 곳이다. 50이 넘어 머리가 하얗게 변하자, 아버지는 그걸 기쁘게 생각했다. 이제는 철강회사 사람들이 자기를 우습게 보지 않을 거 아니냐며 좀처럼 검은 염색을 하지 않았다.


다섯 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아버지는 세 아들 중 유일하게 대학을 다니지 못했다. 대학입시를 위해 서울에서 재수생활을 하던 그때, 할아버지가 바람이 나서 할머니가 아버지를 데리고 부랴부랴 고향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내성적인 시골 사람이었던 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못했다. 25세 때 교회에서 본 엄마와 결혼을 했지만, 할아버지는 결혼 후에도 아빠에게 제대로 된 급여를 주지 않았다. 가장 노릇을 제대로 못하던 아빠가 할아버지의 공장을 그만두고 선택한 일은 돼지 차를 모는 일이었다. 농장에서 키운 돼지를 작은 트럭에 태우고 판매처까지 이동시키는 일이다. 매일 밤 집에는 돼지 똥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던 건 내가 6살 무렵이다. 아버지는 큰 아버지의 공장에서 함께 일했다. 엄마가 학원을 차리려고 모았던 돈까지 모두 끌어들인 형편이었다. 몇 년 못하고 공장은 폐업했다. 아버지는 제대로 된 월급 몇 번 받지 못하고, 다시 백수가 됐다. 그 이후 아빠는 몇 년을 택시기사로 일했다. 성실한 아버지에게 택시기사는 그래도 일정 금액 이상을 보장해주는 첫 번째 직장이었다.


아빠가 추레라 기사가 된 것은 언니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다. 운전 감각이 좋은 아빠에게 추레라 면허는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여러 철강 회사들이 앞다투어 아버지의 고향에 공장을 지었고, 그것을 기회로 아버지는 추레라 일을 시작하셨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딸들 때문에 엄마는 서울에서 학원 일을 계속하셨고, 아빠는 마흔 중반에 자취생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혼자 살았던 5년 동안 아빠는 참 많이 늙었다. 당뇨와 고혈압 약을 먹기 시작했고, 오랜 운전으로 허리도 말썽이었다. 원인 모를 피부염이 시작된 것도 그쯤이었다. 보다 못한 엄마는 막내의 대학입시가 끝나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가 아빠를 보살폈다.


다행히도, 엄마가 내려가고 10년 정도 수입이 좋았다. 그동안 아빠는 돈을 못 벌었던 게 아니라, 번 돈을 엄한 곳에 쓰고 있었나 보다. 엄마가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우리 집 가계경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 돈으로 나와 막내는 대학을 졸업했다. 엄마, 아빠는 고향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일을 하고 계신다.


천 원 한 장이 아쉬운 어떤 날에는 돈을 못 버는 아버지를 참 많이 원망했다. 그런데 그는 항상, 너무도 성실하고 너무도 부지런히 자기 몫의 일을 다 하고 있어서 대놓고 비난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향한 나의 마음이 싫었다.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한 사람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밖에서 트럭 운전사를 만나면, 매번 차선을 양보한다. 아버지를 만나는 마음으로. 장시간 운전을 하고 힘이 드는 날이면, 옆에 있는 남편에게 어김없이 얘기한다. '아빠는 어떻게 하루에 열두 시간씩 운전을 하시나 몰라.'


운전이 힘들지 않아서 열두 시간씩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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