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한창 연애에 물이 오르던 때, 남편과 서울 근교의 산에 갔다. 나는 오르막 길이 싫어서 산을 좋아하지 않는데, 남편은 이 참에 연애 코스로 알려진 것들을 도장 깨듯 하나씩 다 해볼 참이었다.
면허가 없는 그와 함께 전철을 타고, 택시를 타고 어떤 산의 입구에 다다랐다. 한참 회사생활을 하던 중이라 주말엔 좀 쉬어야 하는데, 산 입구에서 몇 걸음 걷지도 않고 나는 지쳐버렸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중이었고, 또 마침 눈 앞에 이삭토스트 가게가 있었다. 나는 선뜻 이삭토스트를 사 먹자고 했는데, 남편은 살짝 짜증을 부렸던 것 같다. 정상은커녕 등산 30분 만에 우리는 등산을 그만두었다. 높지 않은 산이라는 말에 나는 데이트 복장이었고, 등산에 필요한 물이나 간식거리도 없었다. 점점 숨은 턱까지 차 오르는데 계속해서 올라갈 기운이 없었다.
남편은 허탈해하며 산 자락의 산채비빔밥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산채비빔밥은 맛있었지만, 우리 둘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도 몇 달을 만나다가 그 해 겨울, 남편은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내가 한 발 물러서서 결국 헤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왔지만, 내가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는 나를 그냥 잊었을 것 같다.
다시 만나고 남편에게 '그때 왜 헤어지자고 했냐'라고 물었는데, 이삭토스트 얘기가 나왔다. 벼르고 벼르다가 등산을 갔는데, 등산을 시작도 안 한 시점에 이삭토스트를 먹자니 기가 막혔단다. '얘는 분명 된장녀가 틀림없어.'라며 헤어질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된장녀의 ㄷ도 되지 않는 내가 이런 얘기를 듣다니, 어이가 없었다.
살면서 이 일을 잊고 살다가, 최근에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나도 그렇지, 왜 그런 데까지 가서 이삭토스트가 먹고 싶었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나는 종종 그렇게 엉뚱했다. 소심하기 그지없는 애가 그 상황에 가장 맞지 않는 행동을 턱 하니 해버리곤 했다. 그리고 이어진 생각에 알았다. 나는 그들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 엉뚱하고 이기적인 시험을 통과해야만 내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 날 나는 남편에게도 여지없이 당황스러운 과제를 안겨주고, 당신이 나를 받아주면 나도 당신에게 내 맘을 열겠다는 거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간혹 친구와의 약속에 무리하게 늦기도 하고(원래 거의 약속에 늦지 않음), 무슨 이유에선지 밀어냈던 사람에게 갑자기 연락을 하기도 하고, 친하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생일선물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일련의 일들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며 또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건 나의 아빠다. 손자들에게 지나친 장난을 거는 모습, 식당에 가서 얘기가 한창 무르익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가자고 하는 모습, 반갑게 전화를 했는데 툴툴거리거나 빈정거리는 아빠의 말투가 떠올랐다. 그는 계속해서 시험을 하고 있구나. 가족의 애정을, 주변의 관심을 계속해서 갈구하고 있구나.
내가 배운 '교류분석'에서는 이 것을 각자가 가진 '각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무언가에 의해 이러한 각본을 세우고, 이 각본 안에서 계속해서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며 살아간다고. 그래서 이 각본을 인식하고, 스스로 각본을 벗어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를 시험하지 않더라도 그를 믿는 것이 쉬워졌으면 한다. 속고 당하더라도 일단은 믿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