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얼마 전 종방한 '사이코지만 괜찮아'. 처음엔 코미디인 듯 깔깔 웃게 만들더니 이야기가 사뭇 진지해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드라마를 좋아하는 남편이 나보다 더 열광적으로 본방을 사수했다. 그렇게 첫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우리 가족은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정주행 했다.
드라마는 곱씹으며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여러 동화책과 극 중 고문영 작가의 책으로 나오는 창작 동화들을 요소요소 가져와 이야기를 풀어낸 것도 훌륭했고, 나비와 그리스 신화 속의 프시케, 치유 등을 얽어 철학적으로 시청자들을 사유하게 만든 드라마는 오랜만이었다. 철학을 전공한 남편이 좋아할만했다. 나는 심리학 쪽으로 관심이 많아서, 괜찮은 병원 안에 있는 환자와 주인공들의 사연과 심리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조증 환자 권기도(곽도연 분)가 되어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 자유인이 되기도 하고, 문영이 머리를 자를 때 같은 마음으로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기도 했다.
12화와 13화에서 강태는 문영의 엄마가 자신의 엄마를 죽인 것을 알게 된다. 고문영은 14화에서 조금 늦게 그 사실을 안다. 작가는 12화부터 마지막 회인 16화까지 그들의 좌절과 슬픔을 긴 호흡으로 이끌어간다.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말했다. 초반부에 눈길을 사로잡았던 자극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 외에 드라마는 별다른 스토리 없이 느리게 흘러간다. 주인공들은 슬픔을 삭이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낸다.
그 느린 화면들 속에서 강태와 문영은 충분히 슬퍼한다. 누구도 조급하게 이제 스토리를 다시 이어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재촉하지 않는다. 힘들 때는 휴가를 쓴다. 슬플 때는 글을 쓰지 않는다. 모든 것을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극 중 누구도 그런 그들에게 이제 좀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자극 없는 긴 장면들을 보며 울었다. 그 슬픔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장면들이 나를 위한 시간인 듯 느껴졌다.
작은 일에도 깊게 슬퍼하곤 하는 나를 주변에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몇 날 며칠을 힘들어하면 주변에서 들 얘기했다. '그만 좀 해라.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너는 도대체 왜 그러니' 나는 어느새 슬픔의 감정을 빨리 잊는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속에서 감정이 차올라도 겉으로는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혼자 있을 때는 한숨을 쉬다가 다른 이가 함께 있는 공간에서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슬픔은 내 곁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치유되지 못한 슬픔은 내 안에서 천천히 가라앉았고, 누군가 나를 흔들어대면 그 슬픔이 다시 올라와 내 마음을 흙탕물로 만들곤 했다.
드라마에서 엄마가 강태 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영은
강태와 상태에게 계속해서 집에서 나가 달라 말한다.
그런 문영에게 상태는 말한다.
'배 째'.
우리는 그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렸지만, '배 째'는 다른 이의 슬픔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모습이지 않을까. 우리는 그 슬픔을 쫓아내지 말아야 한다. '배 째'라고 말하면서 그 슬픔 곁에 있어주어야 한다. 그 슬픔이 스스로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주어야 한다. 슬픔은 언젠가는 지나간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문영도 강태와 상태의 기다림 앞에 조금씩 슬픔을 흘려보낸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동화책을 완성하고 다 같이 여행을 떠난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슬픔 앞에 대하는 자세는 '분노' 또는 '복수' 같은 것들이다. 이어지는 스토리를 위해 그들의 슬픔은 찰나처럼 지나간다. 한강 변에서 크게 소리 지르는게 다일 때도 있다. 사람들은 드라마에서 슬픔의 감정을 오래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슬픔은 인정받는 순간 지나간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드라마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슬픔을 축소하지 않았다. 전체 줄거리의 1/4을 그들의 슬픔을 돌아보는 데 사용했다. 그리고 그들은 슬픔 앞에 함께 있기를 택했다. 당신의 슬픔을 지켜봐 주는 것을 택했다.
오랫동안 이 드라마의 느린 호흡이 가슴에 남을 것이다. 슬픔이 찾아오는 어느 날이면, 이 드라마를 떠올리며 내 슬픔을 담담히 기다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