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식사시간

by 코뿔소

제가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여러분이 기분 좋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체크해 보세요. 몇 개나 겹치나요?

밥빙고

1~10개: 밥 한 번 먹어요 (먼 산)

11~30: 조만간 보시죠

31~ : 내일 뭐 하세요?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주제는 ‘나를 꾸준히 기쁘게 해 준 것들’이었습니다. 그중 음식 이야기는 한 두 문단쯤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기억이 맛을 부추기고 맛이 기억을 끌고 나오니 상차림은 두 문단을 훌쩍 넘어서 버렸습니다.


처음엔 소박하게 점심과 저녁을 기준으로 일주일 치 메뉴만 떠올렸습니다. 고작 14개, 모자랍니다. 잘 먹지도 않는 아침밥과 야식을 핑계로 표는 28개로 불어났습니다.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두 차례의 증축 공사를 거쳐 마침내 64개의 음식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밖에 맛있는 음식들이 많지만 더 적으면 그것은 빙고라는 형식으로도 변명이 되지 않아 멈췄습니다.


적다 보니 행복해졌습니다. 아래 감상을 읽어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여러분도 한 번 여러분만의 밥빙고를 만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당시엔 사진을 참 못찍었습니다

처음 놀란 지점은, 제가 생각보다 '기억의 맛'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첫 해외 출장으로 간 라스베이거스, 새벽 5시에 먹은 에그베네딕트는 아직도 입안에 남아있습니다. 도쿄로 혼자 떠난 여행, 짐도 풀지 않고 먹은 610엔짜리 규동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엔 부모님의 제지로 자주 먹지 못했던 피자와 햄버거는, 지금도 씹을수록 자유의 감칠맛이 솟습니다. 누군가는 ‘생선은 임연수가 맛있다’고 콕 짚어 가르쳐줬고, 경주에서 먹은 곤드레밥은 그날의 청보리밭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페인의 허름한 호텔 조식 크루아상은, 국내 유명 빵집들을 비웃게 만들었죠. 저 음식들 속에는,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느낀 건, 제가 맛에 대해 생각보다 깊고 사적인 탐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표를 완성하고 나니 미처 담지 못한 디테일이 개탄스러웠습니다. 미역국의 점도, 두부김치의 질감, 닭볶음탕 국물 속 마늘의 점유율. 공간이 부족해 '/' 기호로 묶어둔 몇몇 항목들, 사실 그들 사이에도 크리티컬 한 차이가 있습니다. 괄호나 '+' 기호로 욱여넣은 설명들은 제 마지막 발악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를 뭐든 잘 먹는 누렁이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주면 다 잘 먹습니다. 하지만 맛있을수록 더 크게 꼬리를 흔드는, 말하자면 입맛 좋은 누렁이입니다.


감잔가 고구만가

세 번째로는 제가 왜 그간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대답을 망설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맛의 타임라인을 중요시합니다. 짬뽕을 먹다 보면 단맛이 당기고, 그 단맛은 탕수육이 메웁니다. 간짜장엔 라조육이, 라조육 뒤엔 단무지가 있고, 그 끝엔 보리차가 흐릅니다. 피자의 첫 조각은 기본 그대로, 둘째는 디핑소스, 셋째는 핫소스, 마지막은 가장 맛있었던 방식으로. 저는 이렇게 음식을 순서로, 리듬으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의 메뉴에 대해 묻는 질문에 시원한 답변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며, 제가 먹거리에 이렇게 사적인 디테일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또 이 중 몇몇 음식은 힘든 시기의 유일한 위안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 속에서도 저는 맛있는 것들을 잘 챙겨 먹고 있었습니다. 감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기억들, 교훈을 뽑아내기엔 너무 엉터리인 시간들. 그런 순간들에 무슨 인사를 건네야 하나 싶었는데 오늘 정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앞으로 누군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다 잘 먹어요”라는 말 대신, 이 글을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왈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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