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버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기원은 의외로 낭만적인 에피소드에서 출발합니다. 지금은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컴퓨터가 과거에는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했습니다. 덩치 큰 기계는 많은 열을 냈고,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설치된 통풍구로는 종종 진짜 벌레가 기어들어왔습니다.
1947년, 미 해군이 사용하던 Mark II 컴퓨터의 기판에 붙은 나방 한 마리가 합선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날의 기술자는 이 사건을 '버그가 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 세계 최초로 공식적으로 등록된 버그의 모습입니다.
새벽 한 시, 베개 위에 고요히 누워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CS 채팅이 도착했습니다.
‘가입이 안 돼요.’
사실 흔한 문의입니다. 아무도 없는 척하고 내일 아침 답해도 그만인. 하지만 문제는, 30분 전에 새 버전을 배포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한 문장은 곧 식은땀을 동반한 알람이 됩니다. 왼손으로 커피를 뽑으며, 오른손으로 답을 보냅니다. 개발자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전화는 울릴 뿐 받지 않습니다. 새벽 한 시 반. 깊이 잠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도 혹시를 기대하며, 단서를 빠르게 제공할 수 있도록 하나씩, 가능성을 좁혀봅니다.
“아이폰이신가요?”
“구글 아이디로 가입하셨나요?”
“가입 유형은 어떻게 되시죠?”
결국, 개발자는 깨어나지 않았고,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야 이전 버전으로 롤백함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원인은 단순했습니다. 급하게 버전을 배포하는 과정에서 테스트 버전이 뒤섞였던 것이죠. 테스트용 데이터베이스와 UI가 섞인 끔찍한 혼종이 새벽을 배회했습니다.
며칠 전 누군가 제게 이름의 한자 뜻을 물었습니다. 담담히 대답했지만, 사실은 무척 기뻤습니다. 보통은 제가 먼저 묻는 쪽이었거든요. 그 순간만큼은 주머니에 있는 무엇이라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제 이름은 ‘멀리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살아가고자 애씁니다. 늘 한 걸음 앞을 내다보고, 오늘의 편안함을 위해 내일을 소모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장기투자형 인간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멀리 보기 시작하면 가까운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전략은 잘 짜면서도, 카탈로그 문구를 빠뜨리거나, 인터넷 이전 신청을 깜빡하는 식입니다. 이 실수들이 ‘탈효율 프로젝트’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 버그였습니다. 최적화된 삶에 낭만이라는 실험용 코드를 삽입하자 곳곳에서 오류가 터져 나왔습니다.
제가 놓친 '작은 일'들이 얼핏 그럴 수도 있는, 제 원칙에 따르면 연민으로 처리할 사소한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초년 시절엔 일의 규모와 중요도를 자주 혼동하곤 합니다. 인사, 재무, 전략처럼 굵직한 결정을 내리는 일은 커 보이고, 무엇보다 ‘중요해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잘못되면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조용히 장기적인 체력을 갉아먹기는 하나 수정할 시간도 충분합니다. 반대로, 사소해 보이는 일. 세금 납부, 증빙서류 떼어오기, 공과금 납부. 이런 일들이 잘못되면 바로 내일을 마비시킵니다. 큰일을 보는 시선과 작은 일을 다루는 손 모두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일’들을 흘려보내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예전에 만들어 놓고 잊어버렸던 Notion을 다시 꺼냈습니다. 이전에는 Jira며 다른 생산성 툴도 시도했지만, 이렇다 할 동기 없이 흐지부지되곤 했습니다. 머릿속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두면 충분하다는 오만함도 있었고요.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낭만은 효율과 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들을 모아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떠오를 때마다 하나씩 적었습니다. 덕분에 놓치는 일은 없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기록만 되고, 일이 쳐내지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쳐낼 시간이 없습니다.
Notion은 어느새 작은 일들이 조용히 썩어가는 전시장이 되어갔습니다.
일의 절대량을 줄이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하면 좋은 일'을 구분해야 했습니다. 회사는 늘 돈과 시간이 모자랍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만 하더라도 리소스가 부족합니다. 그런 일만 발라내기 위해 일의 구조를 다시 정의했습니다.
EPIC =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
STORY =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여러 프로젝트
TASK = 그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구체적이고 작은 일들
‘3분기 매출 20% 증가’라는 EPIC이 있다면, STORY는 ‘고객 여정 개선’이 될 수 있고, TASK는 ‘리서치 보고서 작성’, ‘디자인 리뉴얼 요청’ 등이겠지요.
하려고 했던 일을 모두 나열하고 최종 목표와 연결 지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일'과 '하면 좋은 일'이 구분되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오늘 불편해서 쳐내는 일이 줄었습니다. 귀찮은 일도 전체 속에서 어떤 의미인지 확인하니 더 잘 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의 양은 확실히 줄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일만 남기니 뭘 먼저 할지 고민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자동으로 판단해 줄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ICEE
노션에는 '수식'이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일종의 계산기죠. 저는 이 기능을 활용해 우선순위 점수 계산기를 만들었습니다. 우선순위 프레임워크계의 아이돌 ICE (Impact, Confidence, Effort)에 Emergence(긴급도)를 더해 ICEE라는 수식을 만들었습니다.
(Impact × Confidence × Emergence) ÷ Effort
Impact: 이 일이 얼마나 큰 영향을 줄 것인가
Confidence: 그 결과를 얼마나 확신하는가
Effort: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드는가
Emergence: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
여기에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Emergence와 Effort에 가중치를 넣었습니다. 당장 에러가 터져서 난리가 났는데 임팩트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우선순위가 밀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긴급성은 지수함수의 형태로, 매우 높음이면 99999로 치환해 우선순위가 높아지게 산식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냥 파일 하나 던져주면 되는 일을 우선순위 따지며 리스트에 넣어두는 것도 웃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Effort는 로그함수의 형태로, 낮으면 1.5의 가중치가 붙도록 했습니다.
노션 수식으로 표현하면,
if(
prop("Emergence") == "매우 긴급",
99999,
((prop("Impact") * (prop("Confidence") / 100))
*
(if(prop("Emergence") == "긴급", 2.5,
if(prop("Emergence") == "보통", 1,
if(prop("Emergence") == "낮음", 0.8, 1))))
*
(if(prop("Effort") <= 1, 1.5, 1))
)
/ prop("Effort")
)
그렇게 중요한 일들을 더 중요한 순서대로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D.H. 로렌스의 소설『채털리 부인의 연인』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아주 많은 부분이 지금 함께 있으니, 그저 그것을 굳게 지키면서 각자 삶의 진로를 조종해 나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이 문장을 떠올리면, 저는 늘 같은 장면을 상상하게 됩니다. 넓고 하얀 방의 중앙, 하나의 말뚝이 박혀 있습니다. 말뚝에는 두 개의 끈이 묶여 있고,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각자 그 끈의 끝을 잡고 있습니다. 둘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방 안을 배회합니다. 돌고, 돌아서, 어느 순간 우연히 말뚝을 한 바퀴 감고 나면, 둘은 중앙에 가까워집니다. 그렇게 떠돌기를 반복하면 어느 순간 중심으로 향해가는 궤적은 결국 둘을 만나게 합니다. 계획하지 않았고, 그 방향을 향해 살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결국은 만납니다.
수식은 냉정했지만, 삶은 부드러워졌습니다. 낭만과 일이 양립할 수 없는 걸까, 탈효율 프로젝트를 멈춰야 하나 생각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모든 것도 결국 디버깅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만,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과거의 제목은 달라지고, 장면의 해석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이란 과거를 다시 쓰는 순간이라 여깁니다.
다음 버그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진 모릅니다. 아마도 나방처럼 작은 형체로, 새벽 같은 시간에 다가와, 단 잠을 깨우겠지요. 하지만 결국 그 과정도 만나야 할 미래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계속 움직여야겠지요. 극악의 확률로 운명이 내 옆을 잠시 스쳐갈 수 있겠지만, 그때뿐, 움직이길 주저하면 만날 수 없을 겁니다. 계속해서 고민하며 방황하는 정신은 결국 내게 맞는 자리에서 운명을 선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면, 어쩌면 멈춰 있던 건 아닌지 돌아보셔도 좋겠습니다.
업데이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