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들르는 보육원이 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가는 곳입니다. 3월이면 아이들과 정원을 가꿉니다. 커다란 나무를 심고, 그 옆에는 색색의 꽃을, 가장 마지막에는 이름 없는 풀을 심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꽃이나 나무가 인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풀 심기에는 동기부여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에게 “누가 더 일자로 심었는지 보자”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금세 집중합니다. 땅 위에 조용한 줄이 생깁니다.
아이들과 달리 식물원 아저씨는 마지막에 심는 풀을 더 아낍니다. ‘덮개식물’이라고 했습니다. 흙이 마르지 않도록,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막아주는 식물. 문득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건조한 마음과 크고 작은 갈등의 씨앗들. 덮개식물이 없는 탓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진, 일본어, 노래, 격투기 등 좋아하는 일들이 하나 둘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자체도 좋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래에 대한 상상의 소지(燒紙)를 달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본 여행을 간다면, 그 동네 이야기가 담긴 요리를 고를 수 있겠다는 생각. 밤이 되면 하루 동안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나른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쯤 흥얼거리며 재울 수 있겠다는 상상. 물론, 격투기를 실제로 쓸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상상들을 하다 보면 제 유년시절의 결핍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저희 가족은 정치나 경제에 대한 토론은 곧잘 합니다. 하지만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는 일은 어색합니다. 12월의 마지막 날, 거실에 모여 같은 방송을 보면서도, 각자 다른 대사를 따라가곤 했습니다.
사랑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풍경처럼 서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방황할 때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학교 학부모위원회에 들어가셨습니다. 주기적으로 학교에 오셨지만 저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살피되, 스스로 판단하고 실수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셨습니다.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막기 위해 울타리가 된 마음으로 계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아버지는 더 조용한 방식으로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불을 켜면 방 안이 환해지고, 샤워기를 틀면 따뜻한 물이 나오는 하루. 그것이 누군가 지켜내는 삶이라는 건 첫 자취방에서 지로영수증을 받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일탈이든 입시든, 제 사업에서 문제가 생길 때에도, 아버지는 늘 도움을 청하기 전부터 뒤에서 모든 걸 알아보고 준비를 마쳐두신 분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아온 덕에 저 역시 그렇게 자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어야겠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 마음은 문장보다 깊은 곳에 놓여 있습니다.
한편 ‘자식은 부모보다 2% 나아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거의 같은 삶을 반복한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주 작은 차이가 세대를 건너 변화를 만든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후자를 믿습니다. 늦었지만 2%의 따뜻함을 심어보려 합니다. 튼튼한 나무, 예쁜 꽃만 있는 게 아니라 빼곡한 풀이 서로를 지탱하는 정원을 만들고 싶습니다. 집 평수는 줄겠지만 마당에 잔디가 자라고, 거실에 기타 하나쯤은 놓여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 집부터, 익숙해지면 언젠가는 제가 만들 가정도 그렇게 꾸려볼 수 있을 겁니다.
경제적인 안정, 인내심, 문제 해결 능력, 이런 것들은 스스로 자라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게 키워졌으니 누가 다그쳐도 그렇게 클 겁니다. 그보다 제 손이 더 자주 가야 하는 건, 일상의 온기입니다.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어땠는지 진심으로 궁궁해하는 마음씨. 좋아할 것 같은 노래 하나를 건네는 저녁. 별다른 이유 없이 꽃을 들고 돌아오는 휴일. 잘할 필요 없이 서로의 무너질 자리가 되어주는 가정. 그게 제가 꿈꾸는 장면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흔한 장면일지 모르겠지만 저에겐 가장 먼, 가장 탐나는 목표입니다.
예전의 저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 가기 위해 돈과 시간을 벌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들과 어떤 리듬으로 하루를 나눌지 먼저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말투, 하루를 공유하는 호흡, 함께 걷는 속도 같은 것들. 함께 있는 장소보다 함께 있는 방식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같이 갈 사람이 없어져 서운한 때도 있지만, 거기가 더 좋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덮개식물은 조금만 심어두어도 금방 퍼진다고 합니다. 오늘 출근길엔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할머니께는 필요한 것이 없는지 여쭈어보았습니다. 곰탕 한 박스 시켜달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습관이 푸름으로 덮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