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잔불 끄기

by 코뿔소


KakaoTalk_20250626_153207995.jpg 과천의 비 내리는 어느 날

작은 비가 몇 번 내렸습니다. 우산을 꺼낼 만큼은 아니었고, 괜한 생각을 꺼내기엔 충분했습니다. 곧 장마겠지요. 비가 오면 마음이 가라앉곤 하는데, 가라앉는다기보다는 제자리를 찾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는 가장 낮은 곳부터 메워갑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세상은 수평을 찾습니다. 가장 낮은 곳부터, 오래된 마음부터.


좋아하는 일들로 하루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괜찮았고, 그다음은 즐거웠고, 그러다 문득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이렇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될까? ‘내가 좋아서 한 선택이야’ 그게 정말 답일까요? 편하지만, 위험한 말입니다. 그 말은 성급하거나 나태하거나 순간의 공허를 견디지 못한 선택도 품어버립니다. 나를 진정으로 아끼는 선택이 아닌 거죠. 제가 바라는 건 욜로도, 쾌락주의도 아닙니다. 더 단단하고, 더 중요한 무엇. 그걸 찾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첫 번째 원칙

지난 글에서 힌트를 찾았습니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준 사랑을 여기에 쏟는다고 생각해 보자. 아까운가?” 그 문장이 다시 목덜미를 잡아당겼습니다. 다행히 지금까지의 선택은 아깝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를 정말 아끼는 사람들은 제 수입을 넘어선 소비보다 제 마음을 넘어선 과로를 더 걱정했습니다. 그러는 한 편 아무도 제가 술에 찌들기를 바라지 않았고 비싼 물건에 정신없이 기뻐하길 바라지도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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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의 책에서 본 인상적인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우리는 아픈 강아지에게는 약을 꼬박꼬박 먹이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을까?” 그 질문이 담긴 챕터의 이름은 좋은 지침이 됩니다. [당신 자신을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나를 아끼는 대신 참아주기만 하고, 사랑하는 대신 무시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남인 양 바보 같은 선택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진 않은지. 떠오르는 말들을 품고 지난 한 달을 돌아봅니다.


평소보다 돈을 많이 썼습니다. 영어 대신 일본어를 하기로 했고, 골프 대신 격투기를 택했습니다. 노래가 좋아서 보컬 학원에 다니고, 길이 예뻐서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의미 없는 지출은 없었습니다. 저만의 생각일 수 있으니 부모님께 조심스럽게 이 변화들을 말했습니다. 걱정으로 접힌 미간이 눈에 아직 선합니다. “일 그만두겠다는 뜻이니?” 같은 질문이 세 번쯤 반복된 뒤에 아버지는 뜻밖의 말을 꺼냈습니다. “나라면 계속 고민만 했을 텐데, 금방금방 바뀌는 거 보니까 멋지다.” 물론 골프도 영어도 유익하다는 이야기, 대기업 다시 갈 생각은 여전히 없는지 잔소리는 있었지만 반대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통과된 원칙,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을 일일 것.


두 번째 원칙

그런데, 원칙도 때로 짐이 됩니다. 맡은 일은 끝낸다. 뱉은 말은 지킨다. 가장 싫은 일이 가장 필요한 일이다. 품고 살았던 모든 말이 옳지만, 모든 순간을 그렇게 살아낼 필요가 없음을 이제는 압니다. 다만 원칙을 적용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모호하게 두면 결국 '내가 좋으면 됐지'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겁니다. 원칙을 느슨하게 만드는 원칙, 그 모순을 해결하고자 또 다른 문장을 찾았습니다. 알베르 카뮈 - ‘작가수첩’의 한 문장인데, 그대로 좋아서 원칙에 넣었습니다.


원칙은 큰일에 적용하되, 작은 일에는 연민만으로 충분하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참 지혜롭습니다. 이리저리 치인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까지 성실해야 한다면 그 삶은 참 딱할 겁니다. 그런 날에는 연민을 건넵니다. 반면 할 일을 미루고 미루다 마음의 짐만 쌓인 하루에는 연민이 들지 않습니다. 원칙이 필요한 날이죠.


아무쪼록 카뮈의 문장이 제게 연민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스스로를 조금은 봐주는 연습. 가끔은 “에구, 이 정도는” 하고 넘어가는 너스레. 그렇게 우박 같던 원칙은 찰랑이는 연민이 되었습니다. 받았던 애정들을 긁어모아 제 가장 낮은 마음부터 메꿔갈 수 있겠습니다.


여름감기에 걸려 기운이 없이 누워있는 어느 아침입니다. 작은 일이고, 사정이 딱하니 새로 산 스피커로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연민이 알맞겠습니다. 오늘은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KakaoTalk_20250626_153305050.jpg 누워있는 안방 전경 + 새로 산 스피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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