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 정리 못하는 팔자
무엇이든 쌓고 보는 젠가의 정신
나는 정말, 정말 정말 청소를 못한다. 아니 정정하겠다. 정리정돈을 못한다. 마치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오물신과 다름없다. 가는 길을 더럽히고, 있던 곳엔 반드시 흔적을 남기고……내가 뒤처리를 잘하는 곳은 남의 공간뿐이다. 마음잡고 정리를 해보아도 금방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십상이고, 그걸 정리하는 것보다 그 상태에 적응하는 게 더 빠르다. 지금도 책이 일곱 권은 올라와있는 책상 위 겨우 태블릿만 올라가는-그것도 반은 공중에 떠있는-공간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주변 상황에 크게 영향받는 글쟁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초파리가 콧구멍으로 다이빙하는 상황이라도 일단 한 번 집중하면 글을 쓸 수는 있다.
쓸 수는 있다. 문제는 집중까지의 과정이다. 책상이 번잡스럽다는 건 역시 눈 돌릴 여지가 많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다가도 저 책을 들여다보고, 에세이를 쓰다가도 소설이 쓰고 싶어지고, 자기 계발서 한 권이라도 올라와있으면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간신히 쌓아 올린 집중의 탑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한참 시간을 낭비하고 나는 또 생각하겠지. 아, 진짜 정리 좀 하고 살아야 하는데.
정리정돈을 못하는 나와 4평 원룸이 만났으니 이 또한 천생연분이리라……원래 금상첨화라고 쓰고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에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천생연분으로 고쳐 썼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쓰레기 버리고 치우는 일 자체에는 면역력이 있다는 거다. 그럼 문제가 뭐야 싶겠지. 문제는 바로……헤어 나올 수 없는 귀차니즘, 그리고 많아도 너무 많은 물건이다.
귀차니즘은 굳이 설명할 필요 없으니 설명하지 않겠다. 아마 나 말고도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을 테고. 아니 그보다 세상엔 청소보다 재밌는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청소가 업이거나 취미인 분들은 정말, 정말 대단하다!
많아도 너~무 많은 물건. 일단 나는 오타쿠인데, 굿즈 모으기를 좋아하는 오타쿠이다. 과거 굿즈가 잘 나오는 장르를 덕질했을 땐 굿즈 사 모으느라 용돈을 다 날려버릴 정도였다. 줄이고 줄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데, 금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성인이 되고 나선 굿즈가 안 나오는 장르를 파서 다행이다. (나에게 굿즈가 나오는 장르는 농담곰과 치이카와(먼작귀) 뿐이다. 근데 얘들이 굿즈를 너무 많이 낸다. 굿즈 제발 그만 내~!) 굿즈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눈앞에 쌓인 것은 거대한 책의 무덤. 4평 원룸에 책이 백오십 권 정도 있으니 우리 집 풍경은 여러분의 상상과 거의 일치할 것이다. 그 정도면 책으로 침대 만들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침대가 옵션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럼 책은 사백 권정도 됐겠지……침대가 옵션이라 다행이다……. 책을 정리하고, 정리하고, 또 정리해도 끝없이 쏟아진다. 그렇다고 종이책만 사는 것도 아닌데, 전자책도 충분히 사고 있는데! 왜 책의 무덤은 사라지지 않냔 말이다!
하지만 책은 그나마 정리하기 쉬운(?) 편이다. 일단 대부분 사각형 디자인에 크기만 맞춰서 정렬하거나 쌓아두면 되니, 이쪽은 편한 편이다. 나의 또 다른 문제는 폭넓은 기호다. 나는 커피도 좋아하고 차도 좋아하고 음료도 좋아한다. 물론 술도 좋아한다. 눈치채셨겠지만 이걸 다 좋아한다는 건, 이걸 다 집에 보관해 둔다는 얘기다. 보관하지 않고 그때그때 소비하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나는 보관하는 편이다. 우리 4평 원룸은 화수분이나 다름없다. 무언가 계속 나온다……. 커피만 해도 원두와 커피메이커가 한 자리 차지하고, 차도 차구와 찻잎이 한 자리 차지한다. 술은 뭐 말할 것도 없다. 위스키, 맥주, 와인 종류별로 잔 한 개 씩만 보관해도 이미 한 줄이다. 그런데 4평 원룸 찬장이 넓어봐야 얼마나 넓겠는가. 나는 오늘도 취향을 꾸역꾸역 쑤셔 넣고 있다.
이렇게 쓰고 있다 보니 또 나의 책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 떠오른다. 닌텐도 스위치 게임팩이다. 누군가는 카트리지를, 누군가는 다운로드를 선호한다지만 나는 둘 다 적절히 섞어서 사는 덕분에 또또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 나올 게임이 없는 것도 아닌데……벌써 저만큼이면 앞으로는 어쩌려고……열심히 돈 벌어서 넓은 집으로 가는 방법뿐이다. 무엇이든 쓸 수 있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취향을 정리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좁게 사는 걸 선택하고 싶다. 지금까지 쌓아온 내 취향을 단지 집이 좁단 이유로 없애고 싶지 않다. 이렇게 취향을 쌓아 올리기까지 나름대로 공부도 해왔고, 경험도 쌓아왔다. 정말 정말 공간을 차지하는 취미가 아니고서야(예를 들면 집에 파워랙을 갖다 놓겠다던가) 일단은 나의 취미를 다 받아들이며 20대를 보내고 싶다. 아직 체력이 뒷받침해 주니 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