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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효설 Aug 11. 2023

D+19. 책에 파묻힌 삶

책과 나는 좋은 친구일까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면, 책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랐겠거니 넘겨짚는 사람이 있다. 사실 나와 책의 인연은 악연에 가깝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 E북리더기 같은 기계는 있지도 않았을 시절. 엄마는 출퇴근길 책을 읽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었지만, 책을 사는 건 싫어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동네엔 도서관이 많았고, 엄마는 책을 빌려읽길 택했다. 그게 내 불행의 시발점이었다. 일을 해야 하는 엄마에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대출/반납할 여유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건 내 몫이 되었다. 엄마가 읽을 책을 부지런히 보급하는 노예. 만약 그 일을 실패하거나 거역하면 죽도록 맞는 노예 그 자체. 책 반납기한을 어기거나, 책을 빌려오지 못한 날이면 회초리로 얻어맞았다. 울며불며 잘못했다고 빌어도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티 안 나게 옷 아래로 때리라는 아빠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내 돈으로 산 닌텐도 DS를 뺏겼다. 우리 집엔 내 컴퓨터가 없었다.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여가는 책이었다. 그러나 만화책은 안 됐다. 어느 날 밖에서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잔뜩 화가 난 아빠는, 읽고 있던 내 책을 빼앗더니 만화책을 전부 꺼내오라고 했다. 다 꺼내니 50권쯤 됐던 것 같다. 마법천자문 시리즈와 살아남기 시리즈였다. 그리고 그 책들을 나에게 집어던졌다. 만화책을 사보라고 용돈 주는 거 아니라며. 책들은 전부 외가에서 받은 용돈으로 산 책이었다. 아빠는 책들을 전부 갖다 버리라고 했고, 아끼던 책들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나는 도서관에 기증하기를 선택했다. 도서관에 갖다 두면 언제라도 볼 수 있겠지,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가 하면 나에게 허락된 공간도 도서관이 유일했다. 아니 애초에 갈 수 있는 공간이 도서관뿐이었다. PC방, 오락실, 문구점, 당시 끝무렵을 달리던 캔모아 같은 곳도 돈이 있어야 갈 수 있었다. 나에겐 돈이 없었다. 갈 수 있는 곳은 도서관 아니면 놀이터였다. 보통 심부름을 해야 했으니, 내가 향한 곳은 도서관이다. 학교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은 책을 부지런히 빌려다 보는 나를 기특하게 여기셨다. 도서관 이벤트 상품이던, 조잡하게 코팅된 스펀지밥 책갈피를 그냥 주기도 하셨다. 어린 맘에 그게 왜 그렇게 좋았던지, 아직까지 스펀지밥을 좋아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을 빌려다 보는 일의 정체를 알게 되셨을 때, 지체 없이 나를 위클래스로 보내기도 하셨다. 그런가 하면 작은 도서관의 자원봉사자 선생님-사실은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들-도 나를 기특히 여겼다. 엄마의 심부름을 왔다고 하면 착한 아이라며 머리를 쓰다듬고 간식을 주셨다. 내가 칭찬받는 몇 안 되는 시간이었다.

 책과 관련된 악몽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 그러니까 내가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내 동생이 그 자리를 물려받을 뻔했지만, 친할아버지 할머니의 반대로 동생은 노예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스마트폰이 보급되었다. 엄마는 지금 휴대폰으로 웹소설을 읽는다. 나는? 책 덕후이자,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가끔 엄마는 말한다.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건 다 본인 덕이라고. 그럼 나는 속으로 말한다. 내 속이 썩어 문드러진 게 당신 탓이라고.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때는 에세이보다 소설을 좋아했다.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특히 위저드 베이커리와 유진과 유진을 좋아했다. 청소년 추천 도서를 어린이 시절에 다 읽어버린 나였다. 그렇게 읽은 소설이 한 두권 쌓여갈수록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매일 일기를 쓰고, 어설프게 소설을 썼다.

 오늘날 내 좁은 4평 원룸엔 책이 가득하다. 지갑이 허락하는 한 빌려보기보다 사서보기를 선호한다. 도서관엔 이미 다른 사람이 평생 드나들 분량을 드나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도서관에 안 가는 건 아니다. 자주 간다.) 책을 소유하고, 언제든지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는 것. 이건 정말 큰 행복이다. 엄마는 어째서 이 행복을 포기했던 걸까. 그리고 왜 나를 때렸던 걸까. 10년이 지나도, 아니 평생이 지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고작 만이천 원 때문에 내 어린 시절이, 청소년기가 오염됐다는 게 억울할 따름이다.

 부모님을 두려워했던 나는 자라서 그때의 일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생각한 문장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대로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부모님을 증오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은 못하겠다. 나는 여전히 부모님을 증오하고, 할 수 있다면 연을 끊고 싶다. 하지만 나에겐 지켜야 할 동생이 있기 때문에 그건 힘들겠지. 나보다 한참 어린 내 동생은 과거의 내 모습 같다. 나는 동생이 나와 똑같은 길을 밟지 않게끔 하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동생이 나처럼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나에게 가해진 신체적/정신적 폭력은 아직도 낫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서 오늘도 책을 읽는다. 이젠 영화도 볼 수 있고, 게임을 할 수도 있지만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아직 책 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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