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원룸촌

by thinking cloud

원룸촌 빌라들은 생김새가 다 고만고만하다. 층수 제한이 있어 높이도 비슷하고 넓이도 비슷하다. 색깔이나 디자인이 다르지만 규격이 비슷한 것이 레고 조각을 늘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거대 레고 조각이 몇 블록이나 깔려 있으니, 처음 이사 왔을 때는 혼란도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중증의 길치 방향치다.



처음 한동안은 와봤던 골목으로만 집을 찾을 수 있었고, 다른 방향으로 난 골목에서는 집을 못 찾았다. 비슷한 길을 찾았나 싶었는데 두 블록 옆이거나 블록의 저쪽 끝에 있는 편의점을 이쪽 끝에서 찾는 식이었다. 동네 산책으로 나왔다가 미로 찾기로 끝나는 원룸촌 길 찾기. 슈퍼건, 주민센터 건, 소방서 건 오다가다 분명히 봤는데 당장 여기서 거기를 찾으라면 왜 못 찾을까. 결과만 기억하고 과정은 날아가는 옛날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머리에 박힌듯하다. 영 못 찾겠을 때는 큰 도로로 나갔다가 항상 방향을 꺾어 들어가던 은행 간판을 찾았다. 긴가민가 하는 것도 짜증이 일었을 때 겨우 하나씩 기억했다. 그때는 동네가 둥둥 떠 있었다. 어느 곳의 위치도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 위치가 헷갈리는 데는 비슷하게 생긴 외양의 영향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예쁘고 낭만적인 건물 이름도 한몫했다. 내가 거쳤던 희망동 원룸의 건물 이름만 해도 발렌타인, 즐거운 하루, 르네상스였다.

이런 건물 이름도 있다.

에덴힐 (건물주가 기독교인가)

화이트빌 (외벽이 흰색이었을 것 같은데 때가 타서 그레이톤이 되었다)

백합빌, 장미 화원 (꽃 없는 꽃집. 건물주가 꽃을 좋아하나)

윤슬1,2동 (햇빛 달빛에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뜻이라고 함. 궁금해서 검색했음)

조용한 집 (소음발생 자동 경고?)

헤르만 타운 (건물주가 헤르만 헤세 팬이신가? 문학소녀 출신이신가!)


그 외에도 사랑빌, 디럭스빌, 하여간에 좋은 뜻은 빌라 이름으로 다 갖다 붙었다. 이름만 따지면 희망동 원룸촌은 지상 낙원이다. 빌라 간판이 축복의 메시지를 적은 현수막 같다. 나는 그 길을 나아가며 퍼레이드하는 기분을 느낀다. 내가 원룸촌에서 찾은 소박한 낭만이다. 처음에는 건물 이름도 웃기고, 만족스러워하는 나도 웃기긴 했지만.


단, 하나같이 낭만적인 이름들 덕에 건물과 건물 이름을 매치할 수가 없었다. 기억하기에는 과부하가 걸린다. 내가 겪어본 바 팔년을 원룸촌에 살아도 이름 딱 듣고 찾아갈 수 있는 곳은 내가 살았던 건물밖에 없다.

요령을 부린답시고 집을 찾는 데 도움 될 만한 주변 가게의 이름을 기억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원룸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가게 이름들도 심상치 않았다. 큰길에서 집 방향으로 들어가는 코너에 케잌 가게가 있는데 이름이 ‘두근두근’ 이고 그 골목 안쪽의 꽃집 이름은 ‘헤이데이’다. 두근두근에서 만나자 하면, 거기가 어디지? 뭐하는 데였지? 하고 반사적인 의문이 들었다가 한 번 더 머리를 굴린 뒤에 깨닫는다.



내가 사는 원룸이 간판까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지만, 간판은 사는 것과는 상관이 없으니 현혹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살아보면 간판 같지 않은 곳이 분명히 있으니까. 번지르르한 이름에 속지 않는다. 희망동 원룸을 많이 보면서 조금 늘게 된 기술이다. 원룸 말고도 사람, 직장 등 다른 것을 볼 때도 적용하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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