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옵션도 풀옵션 나름

by thinking cloud

부동산 사이트나 블로그에 올라온 원룸을 보면 풀옵션이 거의 기본템이다. ‘풀옵션’. 내 금전과 노동력이 굳는 소리가 들린다. ‘몸만 오면 됩니다’라는 홍보문구가 추가된 곳도 실제로 있다. 이렇게 안정감 있을 수가. 하지만 잘 봐야 한다. 풀옵션의 기준이 빌라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풀옵션, 몸만 어쩌고 하는 말은 ‘나한테 시집오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급의 뻥이니 마음을 비우시길. 혼자만의 기준에 빠져 ‘풀옵션이라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하면서 배신감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가스렌지. 이 네 가지만 있으면 풀옵션이다 하는 곳도 있고, 옷장, 책장, 책상 등의 가구부터 텔레비전, 인터넷 회선까지 깔려있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풀옵션도 있다. (다만, 내가 여태까지 옮겨 다닌 원룸 중에 전자렌지 있는 곳은 없었다.) 옵션을 하나씩 발견하고 나서 그때 좋아해도 늦지 않다.


풀옵션에 또 다른 함정이 있다. 옵션이 다 상태가 좋을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라는 함정이다. 옵션이 있는 것과 옵션이 잘 돌아가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있는 것만 믿고 들어갔다가, 뒤통수 맞은 적이 몇 번 인가.




원룸촌에 첫 원룸 발렌타인에서 처음 세탁기를 돌리던 날 문제가 생겼다. 세탁기 모터가 한 바퀴 돌아갈 때마다 끼익 끼익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서 급하게 껐다. 세탁기가 왜 이래? 누전이라도 되는 거 아닌가. 세탁기 터지는 거 아니냐고!


세탁기 돌려놓고 장보러 갔다오는 코스가 내 살림의 정석이었다. 집에 돌아올 때쯤 마침 세탁도 끝나 있어서 바로 널면 되는 그림이었는데, 이건 뭐 불안해서 나갈 수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세탁기 돌아가는 내내 저 소리를 듣고 있기에는 신경쇠약이 올 것 같고. 할 수 없이 수화기를 들어 부동산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세탁기에 문제가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 세탁기가 안 돌아가요?

- 그건 아닌데요. 소리가 나요.

- ......

- 고장 난 거 아닐까요?

- ...... 아, 그거 원래 그래요. 앞에 학생도 그러던데 소리만 좀 나지 돌아가는 건 문제없다고 했어요. 혹시 안 돌아가면 바꿔 줄게. 연락 주세요.



완벽하게 내가 패배한 전화질이었다. 안 돌아가니까 빨리 바꿔 달라고 딱 잡아뗐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죄로 저 세탁기를 끌어안고 살아야 하다니 막막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막 나간다. 세탁기가 터지면 관리인 아저씨가 책임지겠지. 나는 친절하게 전화까지 해줬는데 아저씨가 그게 정상이라고 했으니. 끼익 끼익 괴로워하는 세탁기를 두고, 우는 아이 내팽개치는 마음으로 방에서 뛰쳐나와 원래 계획대로 장을 봤다.

다행히 세탁은 무사히 종료되어있었고 세탁된 결과물의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아래층 누수 제기도 없었다. 세탁기의 고질병은 결국 낫지 않았지만 다른 원룸으로 이사할 때까지 세탁기를 바꾸지 않았다.




이 경험 이후 원룸을 옮길 때마다 옵션 상태를 꼭 체크하는 습관을 들였다. 어떨 때는 빠지는 부분이 있을까 봐 포스트잇에 적어가기도 했다.

일단 들어가자마자 보일러를 튼다. 보일러는 켜면 방이 금방 따뜻해지기 때문에 동작 여부를 알기 쉽다. 보일러를 켜 두고 에어컨을 체크한다. 전기세 때문에 관리인이 찡찡거릴 수 있는데 그 말은 무시한다. 어차피 집 결정해서 이사하기 전까지는 내가 갑이다.

에어컨 다음에는 수도. 수돗물은 가장 세게 틀어놓고 물이 잘 빠지는지를 확인한다. 변기 물도 내려 본다. 관리 안된 구축에 있다 보면 물이 잘 안 빠져서 스트레스받을 일이 많다. 59형 이상 아파트처럼 화장실이 두 개가 아니기 때문에 단단히 본다. 욕실의 모서리를 확인한다. 모서리에 금방 덧댄 것 같은 두꺼운 실리콘이 덮여있다면 원래 그 자리에는 곰팡이가 끼어있었겠구나 생각해야 한다. 감점이 크다.

가스렌지, 냉장고도 켜본다. 전등은 켰다 껐다를 반복해본다. 콘센트의 위치도 파악한다. 콘센트가 있지만 고장인지 뭐가 막혔는지 2구 중에 1구만 사용 가능한 것이 드문드문 있다. 멀티탭이라는 대책이 있지만 미리 봐 두면 이사 후에 덜 당황한다.

세탁기처럼 미리 체크가 안 되는 경우는?


복. 불. 복이다.

나와 당신의 옵션에 하자가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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