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룸촌 식생활

by thinking cloud

원룸에 살면서 요리를 안 하게 되었다. 원래도 먹기만 좋아했지 요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본가에 있을 때는 한 번씩 떡볶이도 해 먹고, 만둣국도 끓이고 했는데 이제는 만들어 먹는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한다. 처음 희망동에 이사 왔을 때는 자유로운 편식과 내 마음대로 때의 구별 없이 차리는 밥상에 대한 기대가 조금 있었다. 희망동 첫 방이었던 발렌타인에서 된장찌개를 끊여보기 전까지는.



원룸에서 요리란 가성비 최악의 중노동이다. 일단, 도마를 놓을 공간이 없다. 이런 구조인걸 뭐.


부엌구조.JPG <흔한 원룸의 부엌구조> 도마는 어디에.



선 채로 도마를 놓으려면 싱크 개수대 위에 도마를 올려놓고 썰어야 한다. 한 번 칼질을 할 때마다 텅텅 소리가 난다. 소음 신고당할까 봐 관두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 본다. 도마를 책상 위에 올려놓기는 좀 그렇다. 결국 바닥에 달력을 깔고 그 위에 도마를 놓는다. 양반다리로 앉아서 등을 구부리고 재료를 썬다. 양파를 빠뜨렸네? 일어서서 씻어놓은 양파를 갖고 다시 앉는다. 앗, 호박도 있었는데. 다시 일어서서 호박을 갖고 와서...... 이런 식으로 채소 썰기가 끝나면 식욕이 뚝 떨어져 있다. 썰어놓은 재료가 아까워서 겨우 냄비를 불에 올리고 끓이는데, 만들다 질려서인가. 먹기는 하지만 맛을 잘 못 느끼는 지경에 이른다. 금식 고행의 수련방법으로 원룸에서 볶음밥, 카레 만들기를 추천한다. 깍둑썰기 한 냄비면 수행 끝이다.




희망동에 처음 들어오고 방이 어떤지 어른들이 보러 온 적이 있었는데 부엌을 보자마자 한마디 하셨다.

'집에서 반찬 갖고 가라.'

된장찌개를 만들고 나서야 반찬 갖고 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디귿자 아니, 적어도 기역자는 되는 부엌이어야 된장 재료 썰고 양념 섞을 볼을 둘 공간이 있겠다는 것, 원룸이 혼자 살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움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도.

앞으로 생길 원룸은 부엌 구조가 효율적이기를 바란다. 김치 담을 일은 없겠지만, 된장찌개 정도는 편하게 끓일 수 있도록.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이후에도 몇번인가 요리를 시도 했지만 원룸러의 섭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부엌 덕택에 요리할 때마다 생각이 바뀌었다. 불편하지만 못할건 없어-> 단단히 마음 먹어야됨 -> 이건 미친짓이야!

이제 나의 식생활은 사 먹거나 배달이다. 대학가 근처라 포장하던 배달하던 일단 종류가 많아 다행스럽다. 가던 집만 가면 영양 불균형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여 내 원룸 반경 100미터 이내에 위치한 가게 몇 군데를 주식(主食) 식당으로 정해놓았다. 그 주식 식당 목록에 지금은 중국집, 돈가스, 석쇠불고기, 갈비, 해장국, 떡볶이 가게 정도가 있다. 어제 짬뽕을 먹었다면 오늘은 해장국. 이런식으로 돌아가면서 먹는다.


희망동 원룸촌 골목 상가도 자주 가게들이 바뀌는 편인데 나는 새로운 가게는 반드시 가본다. 괜찮으면 계속 가고 아니면 한 번이 유일하다.


아주 가끔, 배달 어플에서 메뉴 결정하기도 귀찮은 지경에 이르면 라면 끓이기, 계란후라이 딱 그 정도만 한다. 칼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얻어온 김치를 가위로 자르고 과일도 과도가 필요 없는 종류만 구매한다. 희망동에서 나만 요포자(요리 포기자)는 아닐거다. 내가 사는 원룸촌에는 퇴근 후 바로 집에 가도 딱히 밥 짓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예로 아는 동생 중에 밥을 자주 해 먹는 원룸러가 있는데 가서 보니 그 동생도 감자조림에 쓸 감자를 재료를 바닥에서 양반 다리로 썰었다. 된장찌개의 데자뷔를 보면서 역시 원룸촌에서 반찬 해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래서 그 동생이 더 대견했다.




본가에 전화할 때면 늘 밥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원룸러가 된 이후의 국룰이다. 밥 먹었니? 하면 자동으로 먹었다고 대답한다. 거짓 사실 여부는 상관없다. 원룸 독거인의 섭생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지만, 안 먹었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걱정은 시작되고 한 바가지의 잔소리를 듣고 먹는다는 약속을 해야 다른 얘기로 넘어갈 수 있다. 꽤 성가신 과정이다. 밥 얘기를 오래 하고 싶은 사람은 써먹을 수 있겠다.


독립하면 자유 편식이 가능할 줄 알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휴일에 일부러 밥 일 인분을 사려고 옷을 바꿔 입고 나가는 일이 이미 자유에서 멀다. 배달 어플만 켜면 시작되는 결정 장애로 한참을 뭉그적거리다 '배달시켜 먹기도 힘드네' 하는 말이 나오고야 만다. 낮에 쫄쫄 굶으며 게으름 부리다가 자기 전에 폭식할 때면 이 것이 원룸러의 애환인가 싶은 한숨을 쉰다. 어머니들은 항상 집에 먹을 게 없다고 하는데도 냉장고에 김치 쪼가리든 고추장아찌든 뭐든 채워져 있다. 진심으로 대단하다.


밥을 꼭 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면 원룸촌이라 하더라도 부엌 공간이 넓은 곳을 찾길 바란다. 세상은 좁지만 원룸은 많으니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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