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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록, 너는 나의 YOU

by 이신우

“You complete me. I’m not what I am without you.”


<제리맥과이어>. 이 영화가 개봉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리맥과이어>는 내 인생 영화다. “You complete me. I’m not what I am without you.”는 이 영화 속 톰크루즈의 대사 중 하나이다. 나는 이 대사를 오래도록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대사이다.


오랜 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대사 속 ‘You’는 그 사람이었다. 이제는 ’You’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다.



‘라이언록’….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뭉클하다. 이제는 영원히 변치 않을 나의 ‘You’는 라이언록이다.

커다란 눈망물, 도톰하고 동그란 코와 입술, 적당한 양의 숱에 사선으로 빗은 갈색의 앞머리. 그의 모습은 마치 만화 속 테리우스를 연상시키는 멋진 왕자님의 얼굴을 닮아 있다. 빛에 따라 조금은 붉은 빛깔이 감도는 밤색의 마체. 커다란 체구와 넓고 단단한 어깨, 튼튼한 네 다리를 가진 라이언록은 나의 반려마이다.


라이언록을 생각하는 이 순간조차 바로 미소가 지어지며, 당장이라도 그를 보고 싶다. 언제라도 그 넓은 등에 나를 태우고 지구 끝까지라도 달릴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언제나 가슴 설렌다.


라이언록은 2014년 4월 15일 제주도 이시돌 목장에서 태어났다. 부마는 엑톤파크, 모마는 어리틀포크이다. 경주마를 좀 안다는 사람들은 다른 말은 몰라도 어리틀포크라는 어미마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라이언록은 대한민국 최고의 금수저 중의 금수저이다. 모마가 같은 형제, 즉 대부분의 남매마가 우수한 경주마로 활동했으며 특히 부마, 모마가 똑같은 바로 윗 형이 그 유명한 ‘트리플나인’이다. ‘트리플나인은’ 최고의 경주라 할 수 있는 대통령배 대상경주를 4연패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대한민국 최고의 경주마였다. 라이언록은 트리플나인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다. 라이언록이 태어났을 때 그의 형인 트리플나인은 이미 경주마로서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하며 우수한 경주마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트리플나인이 경주마로서 대단한 능력을 보여 줄 때마다 라이언록의 마주는 라이언록에 대해 점점 더 큰 기대를 갖게 되었다. 트리플나인은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조교사였던 ‘김영관 조교사’ 마방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생 라이언록은 당시 조교사 경력 6년차인 내가 관리를 맡게 되었다. 라이언록이 내가 운영하고 있는 서울경마장 14조에 맡겨진다는 소식에 많은 경마관계자뿐 아니라 경마팬들까지 놀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라이언록은 당연히 트리플나인이 있는 19조 김영관 조교사에게 맡겨지리라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라이언록은 2016년 9월 2일 가을 어느 날, 서울경마장 14조 이신영 마방으로 오게 되었고 그렇게 라이언록과 나의 운명은 시작되었다.


라이언록의 첫 기승은 내가 직접 했다. 경주로에 라이언록과 내가 등장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쏠렸다. 당시 나는 라이언록이라는 기대치가 큰 말을 관리하고 탄다는 것에 대한 약간의 우쭐함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마음 한편에는 뭔지 모를 부담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첫 데뷔 전까지 매일매일 훈련을 하면서 정말 심혈을 기울여 정성을 쏟았다.


주행심사를 치르고 데뷔전을 치르기 전 즈음에는 완벽한 데뷔전을 치러야 한다는 압박과 강박이 생겨 주행심사를 다시 한 번 더 치르는 유난을 떨기도 했다. 첫 데뷔전을 치르는 날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창원에 계신 마주님께서 직접 라이언록의 데뷔전을 관전하러 새벽같이 경마장에 오셨다. 아직도 생생하다. 라이언록의 첫 경주를 치르던 그 날, 그 순간이. 출발 신호음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고 몇 초가 흘렀을까… 내 심장이 머리에서 심하게 뛰는 것에 나도 놀라 눈을 떴다. 결승선을 향해 달려오는 라이언록을 보고 함성조차 지르지 못한 순간, 라이언록은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1등이었다! 라이언록이 데뷔전을 우승으로 장식한 것이다. 이미 내 눈에는 소리 없이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 벅차고도 아린 눈물이 흐른다.



데뷔전 포함 라이언록은 3연승을 했다. 다행히도.


라이언록의 3연승 이후 이제는 라이언록의 숙명 같은 숙제를 해나가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형의 명성을 뛰어 넘어야 하는 라이언록과 나의 숙제. 그러나 일반경주 3연승 이후 출전한 대상경주에서는 연거푸 졸전을 치렀다. 그 이후부터 라이언록과 나는 주위 사람들의 실망과 걱정, 다른 이들의 야유를 참아야 했고 우리 둘 다 침묵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그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라이언록과 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처음 같지 않게 점점 줄어들었다. 나와 라이언록에게도 편안한 순간이 찾아왔다. 더는 사람들의 시선과 야유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시간은 많은 걸 해결해주었다.


경주마로서 1등급까지 가는 말은 정말 우수한 말들이다. 5세가 되던 2019년도에 라이언록도 1군까지 갔다. 그러나 누구 하나 라이언록이 우수한 말이라고 얘기하거나 인정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나 이외에는. 트리플나인 동생 라이언록은 탁월한 경주마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만은 어느 말보다도 특별한 말이다.



2020년 초,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경마 역사 100년 동안 유례없는, 경마가 중단되는 사태를 맞이해야 했다. 경주를 뛰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많은 경주마들은 경마장을 떠나야 할 상황에 놓였다. 그나마 성적이 괜찮은 암말들은 종빈마로 용도 전환되었고 대부분 말들은 승용마로 팔려 나갔다. 그보다 못한 상황에 처한 대부분의 경주마들은 사실 어디로 어떻게 갔는지 알 수 없다.


2020년 라이언록도 6세가 되었다. 경주마로서 6세는 적은 나이가 아니다. 경주를 뛰지 못하는 나이든 경주마는 고민거리일 수밖에 없다. 라이언록도 은퇴 후 어디로 보내야 할지 고민할 순간이 왔다. 다행히 마주는 라이언록의 은퇴 후 용도에 대한 결정권을 나에게 주셨고 나는 라이언록을 어디로 보낼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핵심은 라이언록과 내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어디, 어떤 곳을 의미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2022년 제주한라대학교 겸임 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제주한라대학교는 비교적 시설이 우수한 말목장과 마사를 보유한 학교이다. 나도 모르게 “여기다~!”라고 외쳤다. 맞다. 라이언록이 올 곳은 여기 제주한라대학교였다. 나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곳.


수십 년 경주마를 타고, 경주마를 관리해오면서 수많은 경주마들이 부상을 당해 경주로를 떠나거나 사고로 죽는 모습을 지켜봤다. 고작해야 5세가 채 되지 않은 말들이었다.


조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힘들 때도 많았다. 직업 이전에 인간으로서 말들을 경제적인 도구로만 판단해야 하는 현실을 늘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내 안의 윤리의식과 충돌을 겪고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저 외면해야만 했다. 내 영역 밖의 일이라 여기며 상황을 합리화시키고 그 순간을 묻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조교사에게 말이란 단순히 경제 활동의 의미만을 가진 동물이 아니다. 내가 직접 말 등에 타고 고삐라는 연결을 통해 함께 교감하고, 온몸으로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말이란 동물. 이러한 말은 경제 활동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반려동물로서의 의미가 더 클 수도 있다. 특히 라이언록은 내게 결코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라이언록은 더 이상 경주마가 아니다. 이제는 나의 반려마이다.



영화 파이터클럽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You are not your job. (너의 직업이 너인 것은 아니야.)” 라이언록과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라이언록, 네가 경주마가 아니라도, 또한 나 역시 조교사가 아니어도 우리는 함께할 거야.”


최근 슬럼프를 겪으면서 나는 라이언록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는다. 힘든 순간에 늘 나와 함께 아픔을 나누던 나의 동반자. 언젠가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가를 그와 함께 달리고 싶다. 경주로가 아닌 그 곳에서 아무런 경쟁 상대 없이 그저 마음껏 달리는 것…. 라이언록과 내가 꼭 하고 싶은 우리의 작은 소망이자 미래다. 라이언록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



다시 한 번 말해주고 싶다. 라이언록에게.


“You complete me. I’m not what I am without you.”


네(You)가 라이언록,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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