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글 한 편
밤새 눈이 내렸나 보다. 새벽의 경주로가 하얗게 눈으로 덮여있다. 어제는 비가 왔는지 눈이 왔는지 내 기억엔 없다. 하루 종일 암막 커튼이 쳐진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으니까 알 리가 없다. 눈 상태를 봐서는 밤부터 내린 듯 보였다. 나는 눈이 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차라리 타닥타닥 지붕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좋아 어느 계절에 상관없이 비가 오는 건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비는 세상을 말끔하게 씻어주는 것 같아 싫을 이유가 별로 없다. 눈은 조금 다르다. 눈이 오는 날이면 동화 속 눈부신 하얀 세상 속 루돌프와 산타 할아버지가 떠오르기보다는 쌓인 눈을 어떻게 치울까 걱정부터 하게 된다. 눈과 먼지가 뒤섞인 도로는 지저분하고 거기다 눈이 얼어붙은 도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특히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함박눈이 내리면 말들이 뛰어야 하는 경주로가 위험하다. 내게 눈이 반갑지 않은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모래주로가 눈과 섞여 얼지 않게 하기 위해 경주로에 염화칼슘을 뿌리면 모래주로가 어는 것을 방지해 준다. 그 대신 모래와 눈과 염화칼슘이 뒤섞인 경주로는 무거운 진흙탕 반죽이 된다. 말들이 뛰기엔 악조건 중에 최악인 상황이다.
주말인 오늘, 내가 관리하는 말이 첫 번째 경주에 출전한다. 경주 경험이 한 번 밖에 없는 말이기도 하고 특히나 이런 악천후 속에서 경기를 뛰어 본 적이 없는 말이라 무사히 경기를 잘 치를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경기 편성으로 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둘 가능성이 높기는 한데 날씨와 경주로 환경이 좋지 않다는 게 기대감을 떨어뜨렸다. 사실 더한 이유도 한 가지 있다. 지난 10월, 11월에 내가 출전 시킨 말이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떨어진 자신감이 기대를 덜 하게 한 요인도 있을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미리 자기방어를 한 것일 수도.
담담하게 경주를 지켜보았다.
눈보라를 가르며 질주하는 경주마를 보면서 강제로 뛰어야 하는 말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그런 생각도 잠시, 이게 무슨 일?
내가 관리하는 말이 결승선을 제일 먼저 통과를 하는 것이다. 하얀 경주로 위 말 무리 속을 뚫고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말이 내가 훈련 시킨 말이었다. 평소 같으면 하늘을 뚫을 듯이 날뛰고 기뻐했겠지만 순간 어제 어두운 터널 속 널브러져 있던 내가 취할 행동은 아닌 것 같아 그냥 덤덤한 척 조용히 즐겼다. 순간, 상황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변화무쌍한 나 자신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터널 밖 빛을 향해 나가리라 무거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시도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일까.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터널이 생각 보다 길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무엇을 한다고 해서 당장 얻어지는 것만도 아니고 때로는 무심코 스쳐가는 일상 속에서 우연히 얻어지는 행운이 찾아오는 것이 삶인 것 같다. 일상 속에 스며들어 묵묵히 지내다 보면 취할 것은 취하게 되고 또 버릴 것 또한 버려가는 것이 삶인 것 같다.
내일 나는 또다시 어두운 동굴을 찾아 들어갈지도 모른다. 어두운 곳을 찾아 숨어들어간다 해도 다시 일어설 나를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믿음이 있는 이상 더는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듯 힘들면 힘든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너무 애쓰지 말고 살아보기로 했다. 나를 위해서.
글을 마무리 하며 오늘 우승의 기쁜 장면에 함께 담긴 하얀 눈만큼은 평소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아름다운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