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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by 이신우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린다. 오후 5시까지 양재역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마주님을 만나기로 했다. 지난 일요일에도 경마장 근처 카페에서 한 시간을 넘게 대화를 했는데.. 오늘 갑자기 또 만나자는 연락이 욌다. 불길하다. 지난 4년간 나에게 4마리 경주마를 위탁 맡기신 분인데 요즘 우리 마방 성적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고 본인 소유의 말도 덩달아 흡족하지 않다 보니 단호한 결정을 내리신 듯하다.

경마장에서는 위탁 조교사를 변경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보니 그다지 충격도 아니다. 5시 정시에 만나서 대화를 나눈 시간은 단 5분. 아메리카노 커피를 시켰는데 반도 채 마시지 않았는데 필요한 대화는 끝이 났다. 4년 동안 경주마를 매개로 나름 끈끈하게 이어온 관계인데 단 5분간의 대화 끝엔 침묵이 흘렀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택시를 타기 위해 카페를 나왔다.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양재역 사거리. 어둑해진 양재역의 빌딩과 차들의 불빛은 비 때문인지 내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때문인지 유난히 번져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순댓국에 소주 한 병 마시고 이 감정을 위로받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마음을 얼른 고쳐먹고 집으로 왔다.


한 직장에서 25년을 있었고 앞으로도 불의의 사고나 잘못을 하지 않는다면 20년을 더 있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행운일 수 있지만 어쩌면 평생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만 있다는 게 무섭기도 하다. 이런 감정은 지금 내 기분이 그래서가 아닐까.


지금 나의 기분은.. 뭐랄까.. 앞으로 정년까지 20년이 남은 나의 직장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관리하고 있는 경주마의 성적을 잘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죄의 대가로 경마장이라는 감옥에서 20년을 더 수감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 같다. 여기서 해야 하는 노역도 여전히 경주마를 관리하는 일이다.


오늘은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여전히 배는 고프지 않다. 냉장고문은 아무 생각 없이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한다. 불안 증상인가. 세 번째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먹다 남은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심리상태에서는 물만 마셔도 체할 것 같은데 비록 순댓국에 소주는 아니지만 먹다 남은 와인으로 나를 위로하고 오늘의 스위치는 일찍 꺼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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