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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여공작소 Apr 06. 2017

반가운

고향을 만나서

2017.04.04.




내 고향은 서울이다. 나는 여태껏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어렸을 적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때면 엄마에게 늘 외치곤 했다. "저거 봐, 바다다!" 바다 같은 강이 관통하는 서울은 어린 아이의 눈엔 더없이 크고 넓었으리라. 줄지어 선 대형 빌딩들과 아침 출근길마다 거리를 빼곡히 채우는 차량들의 기나긴 행렬은 내 고향 서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하고도 차별성 있는 고향 경관이었다. 그 풍경들은 고향이라면 으레 갖는 정감 어린 시골 분위기와는 짐짓 멀었다. 나는 가끔 그 풍경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삭막하여 지겨울 때가 있다.


내 고향은 서울 중에서도 광진구다. 태어난 곳은 잠실이나 학창 시절과 청년 시절의 온갖 추억이 광진구에 간직돼 있는 탓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15년이 넘는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으니 오죽할까. 웃긴 일, 웃지 못할 일, 즐거운 추억, 기념하고픈 과거가 죄다 광진구에 쌓여있다. 그 일들은 광남중학교에, 광남고등학교에, 그 앞 떡볶이 집에, 강변역 근처 테크노마트에, 그 안의 강변CGV에, 그 주변 닭갈비집에 켜켜이 서려서 딱지처럼 굳어있다.


사실 나는 '고향'이란 것을 믿지 않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고향도 서울 정릉이고 어머니의 고향도 서울에서 멀지 않은 김포여서 명절 때 누구나 다 겪는다는 귀향 여정을 경험할 수가 없었다. "고향에 왔다!"는 감상을 느끼려면 오랜 시간을 이동하고 긴 거리를 달려서 도착하는 수고로움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수고로움도 느낀 적이 없다. 이사 역시 멀리 간 적이 드물고 설사 간다 하더라도 한 동네에서 요리 저리 옮겨다닌 수준에 불과해 따로 '고향'이라 할 것이 없다. 고향과 관련된 무엇은 다 '없는 것' 투성이어서, 나는 고향을 믿지 않았다. 고향이랄게 뭐 대순가. 꼭 가야하나. 고향 찾아 가는 것, 다 몸 고생이고 시간 낭비 아닌가. 친할머니가 이북에 있는 개성의 고향 얘기를 할 때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랬던 내가 고향의 실체를 믿기 시작한 건 2년 전 부터다. 광진구 광장동에서 서대문구 홍제동으로 꽤 먼 거리의 이사를 하고난 직후였다. 15년의 추억이 서린 곳을 떠난다는 느낌은 아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중얼대던 기억이 난다. 떠나 온 장소에는 진한 아쉬움과 흘러간 추억이 남았고 도착한 장소에는 불편한 생경함과 설레는 기대감이 따라왔다. 상반된 두 감상 사이에 고향의 실체가 있었다. 두 감상 사이에서 오랜 시간 함께 했던 공간이 그리움으로, 섭섭함으로, 먹먹함으로 다가왔다. 고향이었다.


그런 고향을 최근 새로이 느꼈다. 이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새로움이란 고향의 또 다른 실체, 반가움이었다. 예비군 훈련 때문에 나흘 동안 남양주로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 광진구를 지나쳐 예비군 훈련장으로 향해야 했다. 덕분에 광진구에서 타던 버스를 탔고, 거닐던 거리를 걸었고, 빵 사먹던 빵집에 가서 빵을 사먹었다. 모든 것이 반가웠다. 고향에 다시 온 느낌은 아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중얼댔다. 까닭은 도무지 모르겠으나 마음이 그윽하고 유유했다. 고향 광진구는 조금은 변해 있었지만 2년 전 모습과 비슷했다. 조금 변해 있어서 반가웠고 2년 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아서 더 반가웠다. 고향이었다.


나는 이제 고향을 확실히 믿는다. 말할 수 있다. 고향은 그리운 것이고 동시에 반가운 것이라고. 고향은 장소라기보다 감정이다. 시간과 공간이 오랜 기간 어우러져 빚어내는 정서 같은 것. 이 정서는 고향의 장소성과 시간성을 만나면 스멀스멀 피어 나온다.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포근하게 한다. 이것을 향수병이라고 부른다면, 고향을 확실히 믿는 나는, 앞으로 여러 번 향수병에 시달리게 될 것 같다. 고향의 그리움과 반가움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가보자, 제 각기의 고향으로-.


친할머니가 내게 개성 이야기를 들려 주었듯, 나도 내 손주에게 언젠가 광진구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올런지.


http://blog.naver.com/sungkun6/220565503991 2015년 겨울, 홍제동으로 이사 갈 때 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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