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렇게 생각해?
반장, 부반장이라는 감투를 썼다고 이전보다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아이들을 보면 기특하고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올해 우리 반 반장은 다른 지역에서 3월에 전학을 왔지만 특유의 장난기와 털털한 모습으로 아이들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아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월등한 차이로 당선됐다. 비교적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을 가진 부반장까지 힘을 합해, 올해 우리 반의 반장과 부반장은 남다른 책임감을 가지고 학급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문제는 늘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발생한다. 그날따라 장난기가 발동했던 반장은 점심시간에 몇몇 친구들과 분필을 들고 사물함에 실컷 낙서를 하며 놀고 있었다. 직접 보지 못했어도 시시덕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뒤늦게 급식실에서 돌아온 부반장은 낙서 가득한 사물함을 보고 놀랐고, 그 행동의 주체가 반장임에 또 한 번 놀랐다.
"니가 반장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 한 마디에 반장은 눈이 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 했고 같이 장난을 쳤던 아이들은 둘의 싸한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끼며 서둘러 낙서를 지웠다. 종례 때까지 세 과목의 수업 시간을 지나는 동안 둘은 서로를 바라보지 못했고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종례 시간이 되어서야 교실에 들어간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껴 반장을 먼저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고, 이어서 부반장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봤다. 점심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을 뿐인데 둘 다 눈시울부터 붉어졌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올해 우리 반 반장과 부반장이 이 아이들이라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려고 하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이어 두 명을 같이 불러 서로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을 내가 전달해주기로 했다.
"민선(부반장)아, 유빈이(반장)는 분필로 흐리게 쓰는 낙서니까 잘 지워질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었고 얼른 썼다가 지우려고 했었대. 그런데 미처 지우기 전에 민선이가 교실에 들어온 거야. 유빈아, 민선이 입장에서는 밥 먹고 교실에 들어왔는데 사물함에 낙서가 가득한 장면부터 보게 됐고 그 낙서를 하고 있는 게 유빈이라는 걸 보니까 순간적으로 놀랍기도 하고 무엇보다 교실이 엉망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 그리고 평소에 유빈이가 반장 역할을 잘하고 있었는데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당황해서 그런 말을 했대. 유빈이는 민선이가 들어오자마자 무서운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니까 평소에 잘 지내던 애가 나한테 왜 그러지 하고 섭섭한 마음도 들었고 자기가 진짜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졌대. 둘 다 우리 학급을 위해서 봉사하는 훌륭한 학생들인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둘은 자기 이름이 나올 때마다 슬쩍 고개를 들어서 친구의 표정을 살폈고 뻘쭘하기라도 한 듯 입 속에 공기를 머금기도 했다. 몇 마디 안 했는데 둘 다 표정이 금방 밝아졌다. 앞으로도 둘이 힘을 합해서 우리 반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마지막 말에 웃으며 대답하고는 둘이 손을 잡고 교무실을 나갔다. 둘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모든 아이들 사이의 갈등이 이런 식으로 해결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조금 더 예쁘게 포장해서 서로의 마음을 전달해줬을 뿐인데.
학교는 끊임없이 갈등이 이어지는 현장이다. 어디라고 그렇지 않겠냐마는. 10대 중반을 지나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게 하나하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전달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때로는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내 속마음을 전달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며 미래에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라리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는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겠는데 정말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 많이 어렵다고 느낄 때도 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10대 넘어가면서부터 부모님께 비밀이 생겼다. 부모님과 대화를 정말 많이 했는데 나는 정작 나에 관한 이야기는 살짝 숨겨뒀던 것 같다. 내가 힘들었던 이야기, 속상했던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았고 내가 잘한 이야기를 하는 건 부끄러웠다. 집에 왔는데도 어떤 친구를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그 앞에서 얼굴이 시뻘게지고 대답도 못하면서도 좋아한다는 한 마디 말이 그렇게도 어렵더라. 내가 그 친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난 건 이런 나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어젯밤에 누워서 그 친구에게 보낸 텔레파시가 통해서라고 생각했다. 국문학 공부를 시작했을 때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가 할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참아서 생긴 '한(恨)'이라는 수업 내용을 듣고는 스스로가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한국 사람이라며 합리화하기도 했다.
어른이 되었어도 내 마음을 전한다는 건 내게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가끔 남편과 의견이 충돌하게 될 때 나는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데 정작 그것의 반도 전달하지 못한다. 입만 툭 튀어나온다. 내 생각을,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미숙하다 보니 조금만 진솔 모드로 가려면 눈부터 뜨거워지고 목이 메이기도 한다. 나는 말도 느리지만 생각의 속도는 더욱 느려서 생각하다가 보면 그 상황은 이미 지나갔을 때도 있다. 또 미처 언어로 표현되지 못한 생각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맴돌다가 스스로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내가 아이들 사이에서 서로의 마음을 전달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정작 내 마음은 전달하지도 못하면서!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역할이다. 내 마음을 표현하며 살 수 있도록 노력은 해보겠지만, 그래도 나도 옆에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게 되는 사람, 그런 내 마음을 예쁘게 포장해서 잘 전해줄 수 있는 사람. 그렇다면 이전에 서먹해졌던 사람들과도 대부분 오해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전달되지 못하는 마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알면서도 속마음을 전하는 능력은 좀처럼 발전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노력하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 그렇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