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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Dec 30. 2020

행복에 필요한 무게, 고작 몇 그램

열심히 찾아봅시다

 군살을 조금이라도 예방하기 위해 저녁을 일찍 먹거나 시간이 늦었다면 가볍게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11시가 넘어 잠들기 직전에는 약간 허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야식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서둘러 잠자리에 들곤 한다. 


 그런 보통의 날 어느 밤이었다. 야근하고 늦게 온 남편이 출출하다며 냉장고를 열어보기 시작했다. 냉동실에 냉면 1인분이 남아있는 걸 발견하고는 '이걸 먹을까'하며 내 눈치를 본다. 냉면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10시도 넘은 시간에 냉면의 유혹이란 반드시 뿌리쳐야만 하는 것이었다. 남편 혼자 먹으라 하고 눈길을 돌렸다. 남편은 금방 면을 삶아서 냉면기에 담은 뒤 맛깔스러운 비빔장 양념을 얹어 내가 앉아 있는 소파로 가져왔다. 양념을 비비는데 매콤 달콤 새콤한 향이 내 콧속까지 다가왔다. 그렇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냉면집에서 특별히 주문해 냉동실에 쟁여두고 먹는 애정 어린 음식이란 말이다. 


 발갛게 비빈 냉면을 젓가락으로 들더니 남편이 슬쩍 나를 쳐다본다. '한입만 먹을래요?' 몸속 저 깊은 곳의 지방이가 '안돼, 이 시간까지 잘 참았는데'라며 이성을 깨우기도 전에 내 얼굴엔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못 이기는 척 '한입만 먹을까' 하고는 어떤 예능 프로그램의 맛있는 그 사람들의 입 크기에 도전이라도 하듯 크게 입을 벌렸다. 왜 밤에 먹으면 음식이 더 맛있는 걸까? 이 집 냉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한입만 먹어서 맛있는 걸까 싶어 한입 더 먹어본다. 두 번은 왠지 아쉬우니 한 번만 더 먹어보자. 결국 냉면 한 그릇을 세 젓가락씩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면발을 싹 긁어먹은 남편은 나보고 '한입만 먹는다더니'라고 말한다. 나는 한입만 먹었을 뿐인데?(ㅎㅎㅎ)  


 기분이 좋아진 건지, 보고 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별거 아닌 인스타 피드도 다 재미있다. 야식으로 냉면 세 젓가락 얻어먹었을 뿐인데, 허기가 달래지니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너그럽고 평온한 사람이 된다. 이 순간의 감정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겠구나 싶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행복을 향해 있겠지만 여전히 나는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명쾌하게 답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최근의 내 상황이 어느 정도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고, 힘들게 지나온 시간들도 돌아보니 행복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지지고 볶고 울고 애태우고 불안해하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서도 감히 미소 지을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자리를 못 잡으면서 자존감이 엄청나게 낮아졌던 시기가 있다. 그때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의 내 자존감은 발 밑을 지나 지구의 지각, 맨틀, 핵까지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학교 공부 스타일이 의외로 잘 맞았던 나는 황금기의 대학 시절을 보냈다. 별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랬다며 거만하게 거의 매 학기 장학금을 받았고, 반복된 유형에 익숙해져서였는지 응시하는 자격증 시험마다 한 번에 합격했다. 징글징글했던 고등학교 때의 스트레스는 금세 잊혔고 거듭된 성공에 '내가 정말 인재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잠시 동안. 하지만 임용에서 떨어지고 나니 내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경력 없고, 종교 없고, 어린 여자였던 나는 기간제 자리도 구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황금기에서 떨어진 현실은 더 차갑게만 느껴졌다. 


 운동복을 입고 집에서 10분 거리의 독서실에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계절에 따라 옷차림과 공부하는 부분이 달라질 뿐이었다.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몹시 괴로웠지만 대체로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작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는 그 시간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생각도 종종 했지만, 가끔씩 못 견딜 만큼 서글퍼질 때가 있었다. 정장 입고 퇴근하는 친구와 마주쳤을 때, 잠시 머리 식히려고 들어간 싸이월드에서 친구들의 소식을 확인했을 때, 안부를 묻던 친구가 응원의 메시지 뒤에 덧붙인 '공부 오래 하는구나' 이런 한 마디.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나는 자괴감에 빠질 뿐이었다. 그 감정을 느끼기에 바빠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의 속사정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당시의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내게 주어진 상황도 따지고 보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그럼에도 직장 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피상적인 단면만 보고 부러움을 느끼고, 그 뒤엔 추레한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경로는 반복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금은 나아졌다고 해도 이 경로에서 아예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떤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는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에 대한 대답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긴 할까. 하루하루의 일정에 밀려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생각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나버리고만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행복했던 순간이 아주 거창한 무언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10시가 넘어서 먹는 냉면 세 젓가락, 고작 몇 그램에 행복을 느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행복은, 케이크 속에 기대 이상으로 딸기가 많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일요일 오후 채널을 돌리다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재방송하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무사히 하루를 마치고 다리 쭉 뻗고 누웠을 때처럼 사소한 순간에 무심코 찾아왔다.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결론이지만, 어쩌면 행복이라는 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가벼운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행복에 필요한 무게, 고작 몇 그램을 더 많이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따듯하고 평온해 보이는 웰시코기 :)




 * 2020년 모두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2021년, 더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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