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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Dec 22. 2020

가슴이 뛰지 않아도 괜찮아

심장은 뛰고 있으니

 새해를 한 주 앞두고 여기저기서 올해에 대한 탄식이 이어졌다. 코로나 때문에 한 해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자유학기제에 현장체험 한 번 가지 못하고, 기다리던 수학여행도 날아가버렸다고,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한 해가 며칠 등교도 못하고 사라졌다고, 다들 저마다 가장 억울하고 속상하단다. 전 세계 비상사태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면 동질감에 조금이라도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아이들이 툴툴거릴 때도 나는 그 감정을 약간 길 건너 보듯, 아이들보다 더 힘들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외출을 하지 못해도 퇴근이 좋았고 주말이 좋았다. 천천히 일어나서 천천히 밥을 먹고 천천히 텔레비전을 보고 낮잠을 자고, 어떤 날에는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또 어떤 날도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퇴근하고 오자마자 소파에 누워버렸다. 눈을 감고 쉬다가 잠깐 눈을 떠서 휴대폰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텔레비전을 보다가의 반복이었다. 컴퓨터를 켜는 것도 귀찮아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사람들이 2020년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할 때는 불구경하듯 했으면서 연말이 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뻥 뚫려버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코로나 때문에 나 또한 특수한 한 해를 보냈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평소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성장 여부와 상관없이 하루하루 출근하며 경력을 또 1년 쌓았다. 얼마 전까지 겸직 활동도 했고 대회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으며 미루고 미루던 석사 학위도 코앞에 두고 있다. 연초에는 글쓰기에 푹 빠져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또 무얼 했더라, 몇 글자라도 더 칸을 채우고 싶어 내가 한 일들을 되짚어본다. 한 줄 더 쓰면 이 허탈감이 조금이라도 채워질까 싶어서. 


 주어진 하루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보냈다. 그 하루들이 쌓이고 쌓여서 나이를 먹은 것뿐이다. 그렇게 올 한 해도 저물어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감정은, 내가 객관적으로 무얼 했는지와 별로 관련이 없는 것이다. 소파에 축 늘어져서 눈만 멀뚱멀뚱 감았다 떴다 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진 이유가 문득 떠올랐다. 요즘의 나는, 그 어떤 일에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의무감으로, 책임감으로, 보상에 대한 대가로, 가면을 쓴 채 사회생활을 하고 돌아오면 그 어떤 일에도 시큰둥한 내 모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감정을 돌아보며 내 진심의 우선순위를 정리해봤다. 노력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으면서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좌절감을 느끼는 걸까.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하는 새해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걸까. 번아웃 증후군이라 할 만큼 집중하고 몰두한 일도 없는데 그저 한 해의 피로가 쌓인 걸까. 요즘의 나는, 하고 있는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다. 그 어떤 일에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친한 선생님과 이런 감정을 메신저로 공유하다가 웃음을 터져버렸다. 이 선생님은 아이들이 어려서 2년째 휴직을 하고 계신데 요즘 아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허탈할 수 없다고 하신다. 여전히 아기 같고 말 안 듣는 아들의 모습에 '내가 2년 동안 뭘 한 거지' 싶은 생각만 드신단다. '그래도 애들은 몸이라도 쑥쑥 크잖아요'라는 내 말에 '키 크는 것만으론 성에 안 차나 봄'이라고 대답하셨다. 이전에 '이렇게 근무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나 봄'이라고 했던 내 말과 너무 닮아 있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일단 던져놓고 내 마음은 이게 아닌데 싶어 몇 마디의 부연 설명이 필요했던 문장이었다. 명확한 언어로 표현할 순 없어도 우리의 마음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잠깐 컴퓨터를 켰다가 그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또 모니터를 닫아버렸다.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긴 글은 읽기 싫어서 인스타 이미지만 깨작거리다가 휴대폰 화면도 닫아버렸다. 왜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싶은 일이 없을까. 


 한동안 해야 하는 일들에 밀려, 하고 싶은 일들을 꾹꾹 누르기만 했더니 하고 싶었던 일들마저 다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마음을 글자로 옮겨 보니 스펀지가 떠올랐다가 스프링이 생각났다. 별 뜻 없이 검색창에 스펀지를 쳤다가 스프링을 입력해 보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벚꽃 이미지가 가득이다. 이런 사소한 연결고리로 갑자기 희망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내가 이렇게 단순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란 말인가!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다시 가슴 뛰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도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드러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이 시간을 걱정하며 조바심 느끼기엔 젊음이 너무 아깝다. 가슴은 뛰지 않아도 심장은 뛰고 있으니 괜찮다, 괜찮다. 


언제 봐도 예쁜 벚꽃, 이걸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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