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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Nov 04. 2019

꿈은 크게 더 크게

상상은 프리패스 

 국어 시간이 되어 우리 교실에 들어갔는데 웬일인지 아이들이 칠판을 안 지워놨다. 칠판에는 지난 가정 시간에 공부한 내용인 듯 1. 나의 목표, 2. 나의 역대기라고 쓰여있었다. 칠판지우개를 든 내 손이 '나의 목표' 언저리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 우리 반 아이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발표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던진, 목표가 뭐냐는 질문에 너무 많은 아이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질문에 답이 없을 때도 문제지만 이렇게 너무 시끄러워질 때도 문제다. 가끔은 속으로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내 대답 소리가 잦아들고 한 아이가 친절하게도 서른아홉 살 때의 모습을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거였다는 조건을 알려준다. 그러더니 선생님, 나중에 하와이 별장에 놀러 오시란다. 자기는 하와이에 별장을 운영하고 있을 거라고. 반대 편에 앉은 아이가 지기 싫다는 듯 선생님, 나중에 뉴욕에 오시란다. 자기가 비행기 표부터 다 보내주겠다고. 


 "꼭 보내! 꼭 갈 테니까!"


 자기가 사실은 애플 사장의 딸이었다느니, S 그룹의 후계자라느니,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나는 일부러 더 능청맞은 표정을 하고 오늘 급식 메뉴가 뭐였는지 물어본다. 혹시 우리가 먹은 급식 메뉴에 무슨 이상이 있었던 게 아니냐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미래에 하와이에서 별장을 운영하는 친구의 짝꿍이 입을 열었다.


 "가정 선생님이 꿈은 크게 가지래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맞아, 꿈은 크게 가져야지."





 왜 우리는 '꿈'이라는 질문을 '희망 직업'으로만 이해하는 걸까. 여러 번 의문을 품어보지만 어느 순간 다시 마주하는 '꿈'이라는 질문을 또 '희망 직업'으로 해석하고 풀려고 한다. 장래희망 직업을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도 어렵지만 어떻게 살고 싶다는 식의 대답을 하는 건 훨씬 더 어렵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에 대한 질문에는 장래희망 몇 가지를 끄적거렸을 뿐이라 진정으로 내가 꿈꾸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대학교 4학년 때 교육실습을 다녀오고 나서부터 나의 꿈은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고 운 좋게도 그 목표를 이루어냈다. 신규 시절을 지나 학교라는 공간에 어느 정도 겨우 적응하고 나니 비로소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내가 직업의 종류를 참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학생들이 교사라는 직업을 꿈꾸는 건 교사라는 직업이 의미 있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학생들이 아는 직업의 폭이 좁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클지도 모른다. 매일 같이 마주하는 직업군이 교사인지라 아이들은 어쩌면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익숙한 교사라는 직업을 꿈으로 찍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꿈꿨던 직업은 화가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엄마가 본 애기는 오빠와 나밖에 없는데 그림에는 영 소질도 흥미도 없는 오빠와 반대로 나는 도화지에 색칠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오빠에 비해서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셨던 말을 비교 격을 빼고 칭찬만 하시니 나는 진짜로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그림을 그릴 때마다 주위를 둘러보고 느낀 감정은 절망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남발하시는 칭찬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어려서부터 나는 예체능에는 젬병이었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 나의 장래희망은 작가였다. 작가가 멋있어 보였는지 글 한 번 써본 경험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작가가 되겠다고 했다. 4학년 때 교실 뒤에 붙이기 위해 장래희망을 적어가야 하는 숙제가 있었다. 나의 꿈은 무엇이다. 그 직업을 가져서 무얼 하겠다. 이런 식으로 2 문장씩 써가야 했다. '나의 꿈은 작가이다.'까지는 썼는데 뒤에는 뭐라고 써야 될지 도저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엄마께 도움을 요청했더니 '노벨문학상을 타겠다.'라고 쓰라고 하셨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다른 말을 찾지 못하고 엄마 말씀대로 칸을 채웠다. 


나의 꿈은 작가이다. 작가가 되어서 노벨문학상을 타겠다.


 다음 날 학교에서 과제를 꺼내서 서로 돌려보고 이야기하는데 나랑 이름이 비슷했던 남자 짝꿍이 내 과제를 보고는 입 꼬리를 한쪽 올리면서 비웃었다. 


 "니가 노벨문학상을 타겠다고?"


 짓궂은 남학생의 가벼운 시비 정도로 해석하고 넘길 수도 있었다, 니가 뭔데 내 꿈을 보고 뭐라고 하냐고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렇지, 내가 무슨 노벨문학상을 타겠다고.'


 그 이후 장래희망을 쓰라고 할 때마다 더 어려웠던 것 같다. 나는 뭘 해야 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그것보다 솔직히 말하면 나 같은 사람이 무얼 할 수 있을지 그게 더 어려웠다. 나는 장래희망이 없었던 게 아니라 자신감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생각해낸 직업이 교사 아니면 교수였다. 그냥 이렇게만 써놓으면 나중에 무슨 전공을 가지든 다 포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과목 교사인지, 무슨 과 교수인지 안 쓰고 슬쩍 넘어갔으니까. 


 그 이후 나는 세계지도 책을 좋아하게 되어 지리학자가 되고도 싶었고, 기상 예보를 보는 일이 너무 재밌어서 기상학자가 되고도 싶었고, 생물 시간에 유전자 공부하는 게 재밌어서 생물학자가 되고도 싶었고, 잠깐 수학 선생님이 되고도 싶었다가 일본어 번역가가 되고 싶다고 하다가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자신감이 없어서 선뜻 말하지는 못했지만 사실 꿈이 꽤 많았다고. 





 직업이 정해지고 나니 그 누구도 내게 더 이상은 꿈을 물어보지 않는다. 조금은 섭섭하면서도 이제 드디어 남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을 꿈꿀 수 있어서 좋다. 


 3월 첫 시간 아이들을 처음 만날 때마다 내 장래희망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거라고 말하곤 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아니 노벨문학상을 타는 거라고 말해도 좋겠다. 20여 년 전의 나와는 달리 이제 이 정도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만큼의 뻔뻔함이 생겼다. 내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제 진짜 꿈을 생각해볼까.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부분에 우선순위를 두고 선택하며 살아갈 건지, 어떤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 싶은지. 크게 더 크게 생각해보자. 꿈꾸고 상상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하늘은 파랗게 더 파랗게, 은행잎은 노랗게 더 노랗게, 꿈은 크게 더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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