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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Dec 09. 2019

인생이 어떻게 될 줄 알고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지 마라

 지난주에 아주 반가운 메시지를 받았다. 가채점은 해봐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성적표가 나온 다음에 확실히 알려드리고 싶어 기다렸다면서 사진이 한 장 도착했다. 올 1등급, 국어 백분위 100, 수학 99, 과학 두 과목 99, 98! 헐! 이런 비인간적인 성적표를 언론을 통하지 않고 본 게 처음이었다. 이 성적표의 주인공이 나와 친한(?) 제자 서연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서연이의 중학교 때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 성적표가 이렇게 나온 것처럼 기분이 좋다니, 이런 게 선생님의 마음이라는 건가?


제자의 성적표를 차마 올릴 수가 없어서 언론의 힘을 빌려본다. 이 학생보다 아주 조금 부족할 뿐.


 지난 학교에서 3년 동안 같은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개성도 강하고 나름대로 많이 힘든 학년이었는데 정 때문이었는지 매년 업무분장마다 이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국어과는 중학교 1학년 땐 주 5시간, 2-3학년 땐 주 4시간씩 수업이 들은지라 거의 매일 만나야 했다. 3년 동안 이 아이들을 거의 매일 만났던 것이다! 학년 초 이름을 외우고 아이들의 성향을 파악할 필요도 없이, 아이들도 국어 선생님이 누군지 간을 볼 필요도 없이 우리는 정이 많이 들어서 서로 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정말 끝까지 징하게 말을 안 들었던 몇 명을 제외하곤. 중2병에 걸려서, 뒤늦게 중3병에 걸려서 허덕거리는 아이들을 대하기에도 옛정이 있어 훨씬 수월했다. 

 

 사랑의 유통기한도 3년밖에 안 된다는데, 3년 내내 국어 시간마다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 아이들도 참 질렸을 만도 하다. 아이들의 속마음을 생각하는 건 잠시 미루어두고, 나로서는 많이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3년 동안 같은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는데 만약 이 아이들이 국어 공부를 못하면 내 잘못일 것만 같았다. 그런 부담감 때문에 거의 신규였던 3년 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이 아이들도 3년 동안 많이 성장했고, 신규교사였던 나도 이 아이들과 함께 조금씩 경력이 쌓여가며 성장했다. 과거의 부담감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라는 듯이 재작년에 이 아이들이 수능을 보고 하나둘 연락을 해왔다. 국어 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아이들은 저마다 어엿한 20대가 되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서연이는 조금 특이한 아이였다. 지금은 살을 많이 뺐지만 중학교 때는 꽤나 통통했다. 아주 괄괄한 성격에 목소리는 그 어떤 선생님들보다도 컸다. 추운 날씨에도 스타킹을 신지 않았고 치마는 자꾸만 접어 올렸다. 차가운 복도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 있는 남학생이 좋다면서 지나치게 들이대서 그 남학생은 서연이를 피해 도망 다닌 적도 있었다. 그 언젠가 서연이 담임선생님은 서연이 때문에 교무실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랬던 서연이도 2학년, 3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성장해갔다. 사춘기를 일찍 겪어서인지 이후에는 점점 차분해졌다. 3학년 때는 단발머리를 한 손으로 넘기면서 부끄러운 미소를 짓는 소녀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 말에 의하면 서연이가 깨어있는 시간은 국어 시간뿐이라고 했다. 다른 시간에는 선생님들이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서연이의 방황이 절정이었던 중학교 1학년 때,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혼나기만 하던 시절, 내가 서연이를 칭찬해준 적이 있단다(나는 잘 기억이 안 남). 실제로 서연이는 중학교 때부터 글씨를 반듯하게 잘 쓰고 정리를 잘했는데 그게 내 눈에 보였나 보다. 그 이후 국어 시험에서 96점을 맞아서 잘했다고 해준 그 한 마디까지 더해서 서연이의 마음에 꽂혔단다. 3년 동안 서연이의 담임을 맡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담임선생님과 상담한다고 어머니께서 오셨을 때 서연이가 엄마를 끌고 와서 나한테 먼저 인사를 했던 적도 있었다. 3학년이 되고 첫 국어 시간이 지난 후엔 교무실에 와서 국어 시간에 내가 안 들어오면 자긴 3학년 때 국어 공부를 때려치우려고 했다는 말까지 했다. 이렇게 나를 좋아해 주는데 나 역시 서연이를 향한 마음이 스르르 열릴 수밖에. 우리는 그렇게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첫 수능이 끝나고 얼마 뒤에 연세대학교에 붙었다고 연락이 왔었다. 서연이가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구나, 잘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런데 재수하려고요."라는 말이 이어졌다. 의대에 가고 싶어서 1년 더 공부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수능이 끝나고 얼마 뒤엔 "저 이번 수능에서 국어 1개밖에 안 틀렸어요!"라는 연락이 왔다. (작년 수능에서 국어 영역이 어렵다는 말이 많았다.) 나머지 과목들도 1등급은 받았지만 연세대 의대에 가고 싶어서 1년 더 공부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4년 만에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같이 나오겠다는 친구들을 다 저지하고 나랑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혼자만 나왔다고 말하던 서연이. 중학교 때의 모습은 저 멀리 사라지고 속이 꽉 찬 20대 숙녀의 모습이었다. 언제 이렇게 똑똑해졌는지 서연이의 입에서는 근거 있는 멋진 생각들이 계속해서 언어로 표현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지난 기억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부끄러워했다. 서연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나로서도 신규 교사 시절은 부끄러움 투성이기 때문에.





 아이들 앞에서 여전히 부족한 점 많은 선생님이지만 한 가지 자부할 수 있는 건, 나는 절대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편애하지 않으며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에게도 1년에 몇 번씩 꼭 하는 말이 있다. 


 "옆에 친구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지 마라."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될 줄 알고, 겨우 중학교 시기에 공부를 못한다고 무시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보면 공부 좀 한다는 아이가 못하는 아이를 깔보는 일은 흔하디 흔한 풍경이다. 아마도 공부만 강조하는 어른들의 영향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부끄러워진다. 인생도, 행복도 성적순은 아니다. 차라리 우리 인생도 학창 시절 성적순으로 깔끔하게 정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쉬울까!   


 중학교 복도에 앉아 큰 목소리로 울부짖고 매일 혼나기만 하던 서연이가 의대생이 되고, 의사가 될 거라니. 지금의 서연이 모습을 생각하면 그 힘든 의대 공부도 충분히 해내고도 남을 것 같아서 마음 한편이 든든하다. 사실은 너무나 뿌듯해서 어디 가서는 못하고 남편한테만 자꾸 자랑을 하고 있다. 


 "서연이가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해졌을까요?"


 성적 때문에 지글지글 스트레스받던 과거의 내 모습이 오버랩된다. 나는 공부하는 방법도 몰랐고 기초도 없었다. 나도 이런 성적표를 받고 싶었는데, 아니야, 엄살 대장에 피도 못 보는 내가 괜히 시험을 잘 봐서 의대에 갔으면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공부를 잘 못하길 잘했지. 다시 한다면 잘할 수 있을까, 아니, 어려울걸. 그러니까 서연이는 정말 대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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