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군대에 체험학습을 다녀왔다. 난생처음 군대 밥도 먹어보고 색다른 경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하루 나는 삐딱했다. 10시 20분에 군대 입구에서 인솔자를 만나기로 했고 우리는 10시 15분경 도착했다. 옆에 앉아계신 선생님이 우스갯소리로 "군인들이 얼마나 시간을 잘 지키는지 보자."라고 하셨고 나 역시 괜히 눈이 동그래져서 시계와 바깥 풍경을 번갈아 살펴봤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나서 군인이 급하게 도착했다. 그래 뭐, 3분 정도 늦는 건 아무것도 아닌데, 이전 학교에서 있었던 경험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전에 근무했던 학교에는 군 자녀가 반에 3-4명씩 있었다. 군부대에서 조금 먼 거리에, 일반 학생들이 더 많은 환경 때문이었는지 군 자녀들끼리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 번은 아이가 교무실에 와서 엉엉 울면서 자신을 부하 취급하는 같은 반 친구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 학생들의 아버지는 같은 군부대에서 근무하고 계셨고 계급이 달랐다. 부하 취급하는 아이의 아버지가 더 높은 계급이었고 부하 취급당하는 아이의 아버지가 더 낮은 계급이었다. 아버지들이 군에서 계급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게 무슨 신분 제도도 아니고 더욱이 아버지의 계급 때문에 그 집의 가족까지 밑에 사람이 된다는 게 내 입장에서는 이해 불가였다.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끼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인식의 기저에는 여전히 군의 계급이 그들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에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게 남아있다. 예전에 한 번은 이런 내 생각을 별을 몇 개(?) 달고 있는 군인의 사모님을 만났을 때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런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게 왜 이상하냐고 계급이 다른데 당연한 게 아니냐고 대답하시는 걸 듣고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상사의 집에서 김장을 할 때면 낮은 계급의 부인들이 가서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듣고는 더 경악했다. 모든 군인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사회에서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 군인 홍보 영상을 보고 군인의 종류(?)에 관한 설명을 듣고 아이들은 군복도 입어보고 사격 훈련도 연습해보고 군식도 먹었다. 건빵, 제리 등의 간식도 많이 받았지만 마음이 왠지 무겁다.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그런 계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에도 동의하지만, 돌아다니며 '충성'이라고 외치는 그 두 글자도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충성'이라는 말을 외치는 저 많은 군인들 중에 진심을 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왜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나는 장난으로라도 '충성'이라고 하지 말아야지.
체험학습이 끝나고 모처럼 학년 선생님들이 다 모여 카페에 갔다. 평소처럼 웃으며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어쩌다가 나온 말에 나는 또 한 번 삐딱해졌다.
"나는 그림으로 표현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그게 안 되니까 너무 힘든 거야."
미술 과목이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 나온 말이었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떠오른 생각이 입 밖으로 먼저 표현됐다.
"그러면 그 욕구를 버리셔야죠."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충족이 잘 되지 않는다면, 그 점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할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다른 방법으로 표현할 욕구를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덧붙이는 말 없이 단호박 같은 말이 먼저 떨어졌다. 감사하게도 성격 좋은 부장님은 내 말을 듣고도 껄껄 웃으셨다. 그러면서 수채화 기법을 몰라서 그림을 잘 못 그리셨다는 학창 시절 경험담이 이어진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게 된 걸 보면 미알못인 내가 평소 미술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나?
"그림을 잘 그렸다, 못 그렸다도 주관적인 평가인데. 수채화 기법이라는 것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유명 화가가 수채 물감을 덧칠해서 종이가 벗겨졌으면 새로운 질감 효과를 냈다고 높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어요."
왜 그래야만 해?
집에 돌아와서 군 계급에 대한 내 생각, 카페에서 선생님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남편한테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오늘 유독 선생님들 말을 너무 삐딱하게 받아친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런데 남편의 반응이 대수롭지 않다. 내가 이러는 게 흔한 일이라는 듯이. 그러다가 하는 말이
"자기가 반골 기질이 있어서 그래요."
처음 들어보는 단어지만 무슨 뜻일지 대충 감이 왔다.
"반골이 뭐예요? 진골, 성골의 반대말이에요?"
"찾아봐요. 국어 선생님이 그 정도 단어는 알아야지."
흠,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으로 재빨리 반골을 검색해봤다.
세상의 일이나 권위 따위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기질, 반골. 남편은 내가 반골 기질이 있다고 아주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단다, 헐. 내가 순종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반골이라고 부를 만큼 반항해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기질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단다. 세상 일에 자꾸만 반감이 드는 여러 생각들에 '반골 기질' 때문이다,라고 이름을 붙이니 오히려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초등학교 때 첫 숙제는 안 해가는 버릇이 있었다. 처음에 2학년 땐가 3학년 때는 숙제를 잊어버리고 실수로 안 한 거였다. 그다음 해, 첫 숙제를 하려고 책을 폈다가 '작년에도 안 했으니 올해도 하지 말까?'라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나는 부모님 몰래 여러 해 반복적으로 첫 숙제를 하지 않았다. 숙제하지 않은 사람 일어나라는 담임선생님 말씀에 어느 정도 자신 있게 일어났고 나 말고 또 누가 숙제를 안 해왔는지 둘러봤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내게 이런 경험이 있었다니!
중고등학교, 대학교 시기를 거치며 '점수를 잘 받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긴 했지만 많이도 투덜거렸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 당시 선생님들이 나를 대하는 게 좀 어렵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많이 든다. 검은색 스타킹만 신으라는 규정을 뻔히 알면서도 가끔은 회색 스타킹을 신었다. 교복 재킷까지 다 입고도 추우면 코트를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너무 싫어서 마음대로 교복 재킷을 안 입고 나갔다. '규정이 이러니까 지켜야 해.'라는 말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규정이 왜 그런지, 그래야만 하는지. 지금도 내가 납득하기 힘든 교칙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누군가를 만나 내 솔직한 마음을 한껏 털어놓고 나서 후회할 때가 있다. 대화를 나눈 상대가 나를 따뜻하고 배려심 깊고 좋은 사람으로 생각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내 속마음을 숨기면서까지 따뜻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 생각해볼수록 남편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반골 기질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