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마음가짐의 문제
퇴근 시간 오늘도 어김없이 발걸음이 빨라진다. 집에 가면 1라운드보다 더 힘든 2라운드를 시작해야 한다면서 가속 페달을 밟는 선배 선생님들과 함께 길을 나서면서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다. 나는 육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 저녁 식사를 정성껏 차리는 사람도 아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남편은 저녁을 안 먹는다. 하핫.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시간을 얼마든지 알차게 보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왠지 마음이 급하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다음날 아침 식사 재료를 구입하고, 혼자 후다닥 저녁으로 챙겨 먹을 만한 음식을 찾는다. 가끔은 근처 식당에 가서 혼자 외식을 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귀걸이와 머리핀부터 뺀다. 옷을 편하게 갈아입는다. 밖에서는 전혀 답답하지 않았던 액세서리와 복장이 집안에 들어오면 그 무게가 세 배는 더 나가는 것 같다. 어쩜 이리도 답답하게 느껴지는지.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본다. 유난히 스트레스가 많았던 날에는 나도 모르게 게임부터 켠다.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몸이 스르르 내려가 소파 바닥에 가서 닿는다. 그러면 그날은 그대로 끝! 소파 위에서 한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몸이 소파 바닥과 밀착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퇴근 후 반드시 해야 할 일. 첫 번째, 저녁을 먹고 아침 먹은 것까지 합해서 설거지를 깨끗하게 해 놓기(20분). 설거지는 막상 마음먹고 싱크대 앞에 서면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데 그 앞에 서기까지 왜 이렇게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왜 두 손에서 고무장갑을 벗고 뒤로 돌아서는 순간에야 비로소 닦지 않은 밥솥이, 컵이 보이는지.
두 번째, 학교에서 허둥대지 않을 정도로 다음 진도의 수업 준비해놓기(1시간). 미루고 미루다 늘 샤워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야 식탁에 앉아서 머리를 싸맨다. 책을 펴면 하품과 함께 나오는 눈물과 콧물. 휴지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면서 다음 날 수업 내용을 준비한다. 매일 같이 이런 모습을 옆에서 보는 남편은 조금 일찍 공부를 좀 시작하지 그랬냐며 안쓰럽다는 눈빛을 던진다. 나도 내가 왜 매일 이런 패턴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는 건지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 신기하게도 잠들기 직전이 가장 집중이 잘 된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위해 별다른 일이 없으면 운동 가기(1시간 30분). 집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갔다가 다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 걸리는 시간 총 1시간 30분. 지금은 느껴지지 않지만 이 작은 시간들이 모여 그 어떤 것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줄 거라고 믿는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난달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 리스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게 드라마 시청(30분)이었다. 최근에 드라마를 챙겨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보게 된 <여름아 부탁해>라는 드라마에 뜻하지 않게 집중하게 됐다. 평일 저녁 가족 드라마답지 않게 강한 강도로 불륜과 출생의 비밀, 막장 악역까지 등장하니 나도 모르게 매일 그 드라마를 틀어서 보게 되었다. 끝날 땐 다음 날 내용이 기다려졌다. 그렇게 30분을 드라마 시청에 쏟아붓고 나니 저녁 시간이 훨씬 빠듯했다. <여름아 부탁해>가 끝나고 시작한 새로운 드라마를 한 번도 보지 않은 데는 이 30분을 다른 데 쓰고 싶은 의도가 컸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을 길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일단 시간을 길게 확보할수록 유리하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퇴근을 빨리 하거나 잠드는 시간을 더 늦추는 것.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퇴근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 퇴근 시간에서 더 늦어져도 30분은 넘기지 말자고 목표를 잡았다. 잠드는 시간도 일어나는 시간처럼 내 마음대로 늦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건강한 생체 시계를 갖고 있는 탓인지 나는 꼬박꼬박 열두 시 이전에는 반드시 잠든다.
반드시 해야 할 일도 몇 가지 없는 나처럼 한가한 사람이 저녁 시간을 서두르는 이유, 나는 내 시간을 반드시 해야 할 일 말고 하고 싶은 일에 쓰고 싶은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브런치에 이렇게 글이라도 한 편 더 남기고 싶고, 일본어 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고 싶고, 노래를 한 곡이라도 더 듣고 싶고, 소설책 한 구절이라도 더 읽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예전에 어떤 분의 브런치에서 마흔 이후 잘 나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여파가 아직은 남아있다고나 할까. 나는 이제 직업을 가진 성인이지만 아직 내 마음속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 마음에 성실하게 응답해주고 싶은 거다.
그래 봤자 내 태생은 조금 빠른 나무늘보. 단 하루도 방학 계획표처럼 살아본 적 없는 나에겐 그 어떤 시간보다 쉼이 중요하다. 휴대폰을 충전하는 것처럼 나도 충전이 필요하다. 소파 바닥에 밀착돼서, 침대 매트와 한 몸이 되어서. 남들보다 충전 속도가 조금 늦어도 어떡해. 내일을 위해 충전을 해야지.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을 이래저래 생각해보다가 결론은 이상하게 충전의 중요성으로 향한다.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닐까. 소파 위에서, 침대 위에서 보낸 편안한 시간이 어쩌면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다. 다리를 쭉 뻗고 알차게 쉬어야지.
브런치 시작 52일 만에 브런치 인기글에 첫 입성을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평소처럼 별 뜻 없이 통계를 확인했는데 세 자리 수인 게 이상했어요. 저녁 시간이 된 지금 약 600분이 제 브런치에 방문하셨고 결혼기념일 글을 읽고 가셨네요. 다른 분들껜 비루한 통계일 수 있지만 제겐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흔적을 남깁니다. 확실히 많은 분들이 결혼 생활 관련 글에 더욱 공감하신다는 걸 작게나마 깨달았네요.
브런치를 시작하고 어찌 됐건 스스로가 잘 아는 부분에 대해 써야 될 것 같아 학교 생활과 제 생각을 연결 지어 글을 써봤는데 생각보다 공감을 이끌어내기가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제 많은 분들께 학교 생활은 그저 과거 속 추억이 되어버린 걸 수도 있고 제 글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요. 그리고 브런치를 보면 볼수록 어떻게 그렇게 다들 글을 잘 쓰시는지 저 스스로는 점점 더 작아지더라고요. 하핫. 그래도 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읽고 쓰는 생활이 나쁘지 않습니다. 야심 찬 결심 같은 건 부담스럽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지금까지처럼 편안하게 남기고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