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년 차의 결혼 기념 방황기
시간 참 잘 간다.
매년 새해 달력을 받아 들고 표시하는 것들이 결혼을 하고 나서는 두 배로 늘어났다. 내 생일에 남편 생일, 우리 부모님 생신에 시부모님 생신, 거기에 결혼기념일까지. 2017년 11월 18일 토요일 오후 1시 10분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고 어제 두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했다. 어제 아침을 먹고 있는데 남편이 갑자기 하는 말이 오늘도 평소처럼 운동을 다녀오란다. 당연하지, 나는 오늘 운동을 안 갈 이유가 없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버렸다. 덧붙이는 말이 오늘 결혼기념일이라고 뭘 기대하면서 기다리지 말고 평소처럼 운동을 다녀오라는 말이었단다. 하하. 새해부터 달력에는 표시되어 있었지만 나는 막상 당일에는 결혼기념일인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기념일이라는 말이 오글거린다.
무언가를 기념하고 이유를 만들어 외식을 하고 쇼핑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나는 정작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날에는 한 발 뒤로 빼는 경향이 있다. 남편 생일에는 '오늘 생일'이라고 크게 쓰고 꾸민 부채를 아침부터 들고 밥상에서 기념사진까지 찍게 하지만 내 생일에는 제발 그런 것 좀 하지 말자고 말한다. 여전히 나는 스스로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일에 서툴다. 20대 연애시절 우리는 서로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나도 노력했지만 매 기념일을 먼저 챙긴 건 남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민트 초코를 좋아한다는 말에 다음 만남에 커다란 민트 초코 분말을 직접 포장해서 선물한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밸런타인데이에도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 선물했고, 그다음 달 화이트데이에는 업그레이드된 초콜릿을 만들어 선물했다. 빼빼로데이에는 직접 빼빼로까지 만들고, 케이크를 선물할 때는 데코펜으로 글씨를 써서 주는 남자였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이런 노력은 당당하게 끝났다. 잡은 물고기에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나 뭐라나. 쏘아붙였어야 하는데 이런 말을 듣고도 실없이 웃어버리는 나라니, 그리고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며 스스로도 인정해버리는 나라니, 나도 할 말이 없다.
"왜 결혼기념일에 남자만 선물을 해요?"
결혼은 두 사람이 같이 했는데 주위를 보면 늘 남자만 여자에게 선물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남편은 말했다. 여자가 결혼을 해줬으니까 그렇죠. 대답을 하니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우리는 그런 경우는 아닌 것 같다고 한다. 뭐라는 거야, 어머, 라는 감탄사 뒤에 그냥 또 실없이 웃어버리는 나라니, 남편의 말에 인정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어느새 머리에 또 합리적 판단 모드를 가동한 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결혼이라는 인연을 맺은 경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남자만 선물을 하는 것도 이상하다는 결론을 남편 몰래 내렸다.
그래서 결혼기념일엔 무얼 해야 하지?
몇 주 전부터 갖고 싶은 게 없냐고 남편은 물어봤다. 내가 터무니없는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남편은 사실 몇 주 전부터가 아니라 떠오를 때마다 갖고 싶은 게 없는지, 먹고 싶은 게 없는지 내게 물어본다. 하지만 최근의 질문은 결혼기념일 선물을 겨냥한 질문이었다. 주말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휴대폰 게임을 하다가 "초속 5센티미터 만화책에는 그 여자애가 그 남자애를 찾아간대요."라는 나의 모호한 한 마디에 남편은 초속 5센티미터 만화책을 주문해줬다. 배송료를 면하기 위해 초속 5센티미터 일본어 원서도 함께 주문해줬다. 이게 마치 결혼기념일 선물처럼 되어버린 건가. 머리를 긁적긁적, 긁고 싶어지네.
다른 사람들은 결혼기념일에 뭘 한대요?
내 질문에 남편은 자기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나둘 늘어놓는다. 명품을 좋아하는 친구 누구 마누라는 결혼기념일 선물이라면서 에르메스를 긁었다더라, 그런데 사실 결혼기념일 아닌데도 평소에도 자주 긁어서 친구가 아주 힘들어한다더라, 보통 사람들은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분위기 있는 식사를 하지 않나? 그래서 나갔던 엊그제 저녁의 외식. 왜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고도 한식집에 가서 낙곱새를 먹었는가. 하핫.
낙곱새를 먹고 백화점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산책을 하다가 흑백 사진관 앞을 지나면서 생각이 났다. 우리 결혼기념일의 미션이! 작년 11월에 결심한 게 있었다. 결혼기념일마다 사진을 찍자는 말이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기로 했었지. 작년에 찍은 사진이 어디에 있을 텐데.
작년에 찍은 사진이 없다.
작년에 사진을 찾아와서 어디 잘 보관한다고 넣었던 것 같은데 어디에 뒀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이럴 수가. 조선왕조실록 20권 만화책 시리즈에 넣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스무 권을 다 훑어봤는데 없다. 평생 버리지 않을 만한 물건 속에 넣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졸업앨범 사이에 끼워놨나? 결혼 서약서 중간에 끼워놨나? 오밤중에 책꽂이에 있는 책을 하나씩 다 꺼내 빠르게 넘겨봤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책 앞에 있는 상자 뚜껑을 열어봤더니 거기에 들어있었네! 작년에도 결혼기념일이 열흘 넘게 지나고 나서야 사진을 찍고 상자에 고이 넣어놨었구나. 그래, 우리는 결혼기념일에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
자기 왜 안 나갔어요?
어제 6시 반 운동을 가겠다고 예약 신청을 했더니 무슨 일인지 마감이란다. 이런. 수영을 갔다가 늦게 돌아올 줄 알았던 남편이 일찍 퇴근했다.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는 왜 안 나갔냐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벽 뒤로 자꾸만 한쪽 손을 숨긴다. 그 어느 때보다 큰 꽃다발을 사 왔다. 나는 솔직히 꽃 선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꽃다발보다는 화장지 한 롤을 주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실용파이지만, 이런 생각을 남편에게 강하게 말하지 말라는 조언을 너무나도 많이 받았다. 평생 꽃 선물 한번 못 받으면 나이 들어서 그게 얼마나 서운한지 아냐고.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꽃다발을 사자고 말했는데 그 한 번이 결혼기념일이 될 것 같다. 내가 집에 없을 때 일찍 들어와서 꽃다발 옆에 편지랑 멋지게 딱 놓으려고 했는데 계획이 다 틀어져서 편지는 쓸 시간이 없단다. 우리는 꽃다발을 번갈아 들고 결혼사진 앞에서 오늘의 모습을 남겼다.
결혼기념일엔 무얼 해야 해
1. 사진관에 가서 사진 찍기
2. 꽃다발과 편지 선물 받기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 문득 다른 사람들의 결혼기념일이 너무 궁금해진다. 아무쪼록 결혼기념일이라는 단어처럼 결혼을 기념할 수 있게만, 딱 그 정도로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