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조 Jan 07. 2020

취미에 대한 고백

솔직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주말에 채널을 돌리다가 가끔씩 소개팅 프로그램에서 멈추고는 한다.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이제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을 느껴보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추측해보기도 한다. 내 멋대로 등장인물들이 잘 어울리는지 어떤지 판단해보기도 한다. 앉은 순서대로 자기소개가 이어진 후엔 어김없이 자유롭게 질의응답을 나누는 시간이 주어진다. 역시나 한 여자분이 그런 질문을 한다. 


 "일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엔 주로 뭐하세요?"


 취미가 뭐예요? 소개팅이나 면접에서 빠질 수 없는 질문이 오랜만에 뇌리에 꽂혔다. 학창 시절에도 3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자기소개서에 취미, 특기 쓰는 부분이 있어서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취미는 쓰기 쉬웠다. 특기란을 채우는 게 어려웠다.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능이나 기술', 한 마디로 '잘하는 것'을 쓰라니 자신감이 없는 나는 빈칸으로 냈던 적도 많다. 선생님이 되고 나서 아이들이 써낸 특기를 보니 생각보다 대다수가 '잠 자기'라고 적은 걸 볼 수 있었다. 그게 무슨 특기야, 생각하면서 나도 오래 자기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는데 그렇게 적을 걸 싶은 후회도 살짝 들었다. 그 어떤 날에는 교실에서 몇 시간까지 자봤느냐에 관해 아이들과 배틀을 해본 적도 있었다. 어차피 검증은 불가. 오래, 많이 자는 게 자랑인 듯 아이들은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내 대외적 취미는 오랜 기간 독서와 영화감상, 음악 감상이었다. 사실 이런 것만큼 쓰기 무난한 취미가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 독서라니 세상에, 내가 책을 얼마나 읽지? 끽해야 한 달에 한 권 정도? 그마저도 안 되는 때가 허다한데 이걸 취미라고 해도 될까. 그렇다면 영화감상? 얼마 전부터야 깨달았다. 나는 영화 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집에서 보는 영화에는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 영화관에서 봐도 대부분의 영화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다가 꽂히는 한두 편의 영화를 위해 그 많은 영화를 보는 일들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음악 감상은? 매일 음악을 들으니까 이 정도면 그래, 취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음악에 집중한다기보다는 그저 배경으로 틀어놓는 건데 취미라고 해도 될까? 


사전이 알려주는 취미의 개념



 그럴듯한 취미 하나 정도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몇 년 전엔 잠시 피아노도 배웠었다. 세 달 정도 배우다가 그만두니 다시 악보 까막눈이 되었고 성급하게 산 키보드에는 먼지만 쌓이고 있다. 색연필, 사인펜, 파스텔 등 각종 채색 도구를 한가득 사서 컬러링도 했었다. 며칠에 걸쳐 컬러링북의 두 페이지를 색칠했다.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힐링은커녕 눈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이것 참 컬러링이라는 게 나를 총체적으로 피곤하게 했다. 이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필라테스를 몇 년째 하고 있으니까 이걸 취미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필라테스를 즐기고 있나. 여전히도 너무 뻣뻣한 몸에 필라테스 하러 가는 건 내게 거의 병원 가는 것과 비슷한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취미 하나 갖기가 이렇게도 어렵다니!


 



 취미를 이야기했던 그 수많은 자리에서 나는 왜 솔직하지 못했을까. 스트레스받을 때, 심심할 때 분명하게 하는 일이 있으면서도 왜 떳떳하지를 못할까. 게임을 하는 게 그렇게도 부끄러운 일일까!


 2012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특기'라고 할 만한 일을 찾았으니 그 이름은 바로 '애니팡'. 그 당시 애니팡의 인기는 대단했다. 동시접속자 수가 200만 명 이상이라며 이 정도면 전라남도 인구 이상이라는 우스갯말도 있었다. 나도 그렇게 모바일 게임에 입문하게 되었고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내 손가락의 움직임은, 눈동자를 굴리는 속도는 생각보다 많이 빨랐다. 돈을 한 푼 들이지 않고도 매주 1위를 달성했으니. 만나는 지인마다 '내 카톡 목록에서 너가 애니팡 1등이다!'라는 말을 해주었고 이 말은 다음 주에도 집중해서 애니팡을 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신기록 보유자가 다음 대회에서 가지는 부담감을 작게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잘하는 부분이 있고 그 일을 하며 사는 게 맞다면 나는 애니팡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왜 하필 애니팡, 흑흑. 


 애니팡은 서로 하트를 보내고 요청하며 카톡 친구들 사이의 관계를 더 끈끈하게 만들어주었는데 맹세코 나는 하트를 위해 연락하지 않는 사람에게 초대 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다. 그 정도의 절제는 할 줄 안다고. 그런데 애니팡의 입장에서는 실수로라도 초대 메시지를 보내게 해야 하는 것인지 매일 같이 카톡 친구 목록을 띄워주며 초대하고 하트를 받으라고 했다. 급한 마음으로 로딩을 기다리다가 딱 한 번 실수를 한 적이 있다. 담임반 남학생한테 시험 전날 애니팡 초대 메시지를 보내게 되고는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비볐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조카가 내 휴대폰을 갖고 놀다가 잘못 눌렀다고 할까 어쩔까. 그러고 며칠 동안 그 남학생 눈치를 살폈는데 이 장난꾸러기가 모른 척해주는 걸 보고는 너무 고마워서 뒤에서 혼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애니팡 1의 인기가 사그라들며 나도 애니팡 1을 그만뒀고 이어서 애니팡 2, 프렌즈 팝, 캔디 크러쉬를 거쳐 지금은 애니팡 3에 정착했다. 시간제한이 있었던 애니팡 1에 비하면 그 뒤의 게임들은 이동 횟수만 맞추면 되었기 때문에 훨씬 여유로웠다. 애니팡 1처럼 경쟁을 부추기지도 않았다. 게임을 하는 인원이 그때만큼 되지 않는다는 이유도 크겠지만. 그래서 요즘은 주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아주 가끔은 혼자 밥을 먹으면서도 애니팡 3을 한다. 이 정도면 부정할 수 없는 취미!


 재작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같은 교무실 선생님들 폰번을 저장했는데 알고 보니 옆 짝꿍 선생님도 애니팡을 하는지라 한동안 하트를 주고받으며 남몰래 정을 쌓아갔던 적이 있다. 그 선생님도 꾸준히, 열심히 하는 듯했지만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했을 뿐인데. 날이 더웠던 어느 날, 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이 선생님 말씀이 더 이상 자존심이 상해서 게임을 못하겠다고, 헐! 그렇게 게임 친구를 또 한 명 잃어버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천천히 넘어가고 있는 스테이지

 




 

 가끔 어려울 때도 있지만 집중해서 하다 보면 어느새 또 넘어간다. 남편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못 깨면 깰 수 있게 프로그래밍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이렇게 작용하는 운도 우리 인생과 닮아있지 않냐며 또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 몇 년째 내 취미는 애니팡이었다. 이게 그렇게도 부끄러웠던 걸까. 어딘가에서 다시 질문을 받으면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때는 요 몇 달 사이에 새로 생긴 취미인 '브런치'라고 대답하려고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 출신 며느리의 부산 사투리 체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