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드니의 겨울
지난여름, 홍콩을 경유해서 시드니에 다녀왔다. 홍콩 공항에서 주어진 시간은 단 2시간! 홍콩 공항에서 2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걱정은 시간이 너무 짧아서 느껴지는 아쉬움으로 금세 바뀌었다. 이유는 바로, 홍콩 공항에 디즈니 스토어가 있기 때문. 캐릭터 덕후 기질이 있는 나는 디즈니 스토어 상품 하나하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심히 구경했다. 눈 돌리는 데마다 미키 미니가 웃고 있으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시드니까지 시간은 더 오래 걸렸지만 경유한 덕분에 비행기 값도 아끼고 디즈니 스토어도 구경했으니 대만족이었다. 그런데 시드니 도착해서 뉴스를 보니 홍콩 공항 폐쇄!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홍콩 공항이 폐쇄되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운이 참 좋았다.
어려서부터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하면 어렴풋이 호주를 떠올렸다. 호주산 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고, '호주'라고 하면 드넓은 초원에 캥거루가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나무 위에는 코알라가 늘어지게 자고 있을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주어진 긴 휴가 기간에, 남편 친구가 시드니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절호의 기회였다. 여행지에 지인이 있다는 건 든든한 보험과 같은 느낌이다. 여행지 어딘가에서 길을 잃어도 찾아줄 것만 같은 느낌. 게다가 시드니의 겨울은 비수기라 여름보다 살짝 저렴하기까지 했다.
시드니의 겨울은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하다는 말에 얇은 겉옷을 챙기고 비상용으로 경량 패딩을 하나 넣어갔는데 결과적으로는 거의 매일 경량 패딩만 입었다. 내 옷차림은 그러했지만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면 인종만큼이나 옷차림도 다양했다. 옷차림만 보면 지금이 도대체 여름인지, 가을인지, 겨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는 꽤 쌀쌀한 편이라 만약 다시 간다면 나는 조금 더 두꺼운 겨울 옷을 챙겨가기로. 예상했던 대로 햇살은 강하고 바람은 신선했다. 시드니의 겨울은 매일 같이 내가 좋아하는 날씨가 이어졌다. 그런데 시드니의 유명 상품은 어그부츠인데 이런 겨울 날씨에 어떻게 어그부츠를 신는 거지? 발에 땀이 많이 찰 것 같다.
호주 사람들은 산을 그릴 때 우리나라처럼 꼭대기를 뾰족하게 그리지 않고 평평하게 그린다고 한다. 실제로 호주의 산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커피 이름으로만 알던 블루마운틴에 가보니 실감할 수 있었다. 정상이 넓고 평평했다. 블루마운틴은 우리나라의 실력 좋은 등산가들이 오르기에는 시시할지도 모르지만 반나절 정도의 일정으로 큰 무리 없이 트래킹 하기에 딱 좋았다. 블루마운틴 트래킹 후에 향한 곳은 페더데일 동물원! 입장하자마자 왈라비들이 여기저기서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왈라비가 모여 있는 곳을 지나니 캥거루들이 보였다. 비교적 어린 캥거루들만 풀어놨는지 사람들이 따라다니면서 만져도 별 반응이 없다. 쪼그려 앉아 캥거루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 등을 만져봤다. 감촉이 좋다. 캥거루 눈빛이 너무 선해서 반해버렸다. 아직도 캥거루의 호수 같은 눈빛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인상파 코알라와 다소곳한 웜뱃까지, 동물들을 철창에 가두어놓은 게 아니라 그들이 자유롭게 생활하는 곳에 놀러 간 느낌이라 좋았다.
남편 친구 부부와 일정을 함께하기 위해 월요일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탔다. 이곳은 우리나라보다 하루를 더 일찍 시작하고 일찍 마치는 느낌이었다. 아침 7시, 2층짜리 지하철은 출근하는 사람들, 학교 가는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다를까 싶어 유심히 봤다. 지하철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람,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들, 별 다를 게 없었다. 친구 말에 의하면 실제로 시드니에서도 학군에 따라 동네의 집값도 따르고 과외를 받는 학생들도 많다고. 대신 우리나라보다 기술자에 대한 대우가 훨씬 좋다는 게 차이점이랄까.
우리나라의 경쟁 사회에 지친 사람들은 가끔씩 꿈꾸곤 한다. 캐나다나 호주 같은 나라에 가면 이렇게 찌들어 있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본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이민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녁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게 제일 좋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그 만족의 이면에는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에 밴쿠버에서 만났던 분은 동네에서 가까운 공원 정상에 올라가는 걸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그곳이 한국의 풍경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반화할 수는 없을 거다. 그리움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호주 출근 시간의 지하철에서, 지상낙원은 없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해버렸다. 그것은 안타까움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동지 의식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이기도 했다.
열흘 동안 시드니 시내에 있는 같은 호텔에 묵었고 시드니 이외의 다른 도시에는 가지 않았다. 아직 여행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어딘가 가면 아침 일찍 나서서 한 군데라도 더 둘러보기 위해 파이팅하기 바빴다. 해외여행의 경우 더 그랬다. 세상에 갈 데가 얼마나 많은데 이 멀리까지 언제 또 와보겠냐는 게 내 생각이었다. 맞는 말이다.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일단 안 가본 곳 중에 고르려고 할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지친다는 거다. 여행을 갈 때마다 하루에 3만 보 정도 걷게 되는데 하루, 이틀까지야 괜찮지만 그다음부터는 경치고 풍경이고 너무 힘들 뿐이었다. 시드니로 여행지를 정하면서 남편에게 우리도 좀 여유로운 여행을 해보자고 말했었다.
욕심부리지 말고 시드니에서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보자 생각하고 계획도 세우지 않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시드니에는 볼거리가 넘쳐났다. 그런데 어쩌면 이 생각이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볼거리가 넘쳐난다고 하기에는 너무, 갔던 곳을 여러 번 반복해서 갔기 때문이다. 서큘러키 역 앞에 맥도널드가 있는데 사람도 많지만 갈매기도 엄청나게 많았다. 무언가 먹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갈매기 떼의 공격이 시작되는데 그 장면이 궁금하다며 시간이 날 때마다 역 앞에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해가 질 때쯤에는 시드니 천문대에 올라갔다. 이곳은 시드니의 일몰 명소로 하버브릿지와 오페라하우스가 한눈에 담긴다. 그리고 밤이 어두워지면 달링하버를 한 바퀴 돌고 숙소로 돌아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여행 갔던 곳을 모두 다 잘 기억하지는 못한다. 가끔은 내가 갔던 곳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좋아 보인다며 가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도 갔었다는 기억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 패키지여행으로 갔던 곳, 시간에 쫓게 아주 잠시 머물었던 곳이 주로 그렇다. 지금까지 여행했던 곳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바로 시드니인데 그 이유가 반복학습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너 번씩 가보고 나니 이제야 겨우 가봤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런 멋진 풍경을 한 번만 보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서너 번을 봤어도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또 시드니에 가고 싶다. 익숙함을 입은 여행 경험은 더 멋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시드니에서 좀 아쉬웠던 게 음식이었다. 입맛에 착 맞는, 맛있는 음식을 찾기 어려웠다.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해보고 한 군데씩 맛집 탐방을 해보았지만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그래서 결국 먹는 것도 반복해버렸다. 내가 시드니에서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맛있었던 건 요미 요거트! 차이나타운에서 파는 건데 요거트 안에 쫀득한 흑미가 가득 들어있다. 상상만으로는 구더기 같을 수 있지만 버블티와는 또 다른, 색다른 맛있음이었다. 마지막 날 밤에도 줄을 서서 요미 요거트를 사 먹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그릴드 버거! 호주에 있는 수제버거집 그릴드는 숙소 앞에만 해도 몇 군데나 있을 정도로 매장이 많다. 남편은 그릴드 버거를 먹을 때마다 아주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반복해서 먹었기에 잘 기억이 난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호주 산불이 2월 중순에야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고 한다. 6개월 동안의 산불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10억 마리 이상의 야생동물이 피해를 입었다는데 상상이 안 될 정도다. 캥거루의 호수 같은 눈망울이 아른거린다. 부디 이전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이길. 햇살이 따뜻했던 시드니의 겨울이 다시 보고 싶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