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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Apr 12. 2020

우리 취향의 교차점을 찾아서

쌈빡한 영화 좀 보자

 "이런 거 말고 좀 쌈빡한 영화 없어요?"


 요즘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두 편의 영화를 본다. 코로나와 넷플릭스의 영향인 듯. 한 편이 아니라 두 편을 보는 이유는 남편이 고른 거 한 편, 내가 고른 거 한 편을 공평하게 돌아가며 보기 때문이다. 둘이 같은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는 아주 흥미롭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웬만하면 시작한 영화를 끝까지 다 보려고 하지만 가끔은 남편이 고른 영화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버리기도 한다. 남편 역시 내가 고른 영화를 보다가 폰이나 컴퓨터로 시선을 돌릴 때가 있다. 


 우리는 영화에 관한 취향도 너무나 다르다. 어디 영화만 그럴까. 같은 집 안에서 음악을 따로 듣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따지고 보면 음식에 있어서도 남편은 면을 좋아하고 나는 밥을 좋아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둘 다 밥도 면도 잘 먹기 때문에 다행히 이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 아무르


 남편과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친밀도가 덜하던 시절, 우리가 극장에서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는 아무르였다. 그때 대다수의 상영관에서는 레미제라블을 하고 있었고, 영화를 보자는 말에 나는 당연히 남편이 레미제라블을 예매했을 줄 알았는데 아무르라니 웬걸.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음악이나 미술, 영화 쪽에 상식이 많아 보이는 점에 호감이 갔던 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일반적이지 않은 영화를 선택할 줄은 몰랐다. 상영관에 들어가서 앉아있는데 영화 시작하기 직전까지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아 깜짝 놀랐다. 토요일 저녁 코엑스 극장에 사람이 없다니! 덕분에 남편은 자기가 극장을 빌렸다는 아재 개그를 칠 수 있었지만. 


 행복하고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부부에게 뜻하지 않은 아내의 마비 증세가 다가오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린 아무르라는 영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화려하고 인기 많은 영화를 주로 봐왔던 나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영화가 조용할 수가 있는지. 사랑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솔직히 많이 지루했다.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런 영화를 같이 보자니, 이렇게 늙을 때까지 같이 살자는 거야 뭐야. 시선은 영화를 향해 있었지만 김칫국을 마시며 머릿속에는 딴생각들이 날아다녔다. 지금도 가끔 생각날 때마다 나는 어떻게 처음에 이런 영화를 보자고 할 수 있냐고 말하고, 남편은 아무르는 정말 훌륭한 영화라고 말한다. 우리는 취향이 다르다. 


 취향이라는 걸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굳이 간추려보자면, 나는 좀 더 대중적인 취향이고 남편은 상대적으로 마이너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쌈빡한 영화를 보자고 말하고 남편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를 보자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대중적으로 흥행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남편이 좋아하는 작품은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취향이라는 것은 옳고 틀림의 문제도 아니고 수직적인 관계도 아니다. 보다 다양한 취향이 공존해야 예술의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지만 한 집에서 이렇게 취향이 다르니 가끔은 서로 아쉬운 마음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남편이 싫어할 때는 괜히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같고, 남편이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내가 한 마디로 잘라버릴 때 남편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남편의 좋아하는 종류의 영화들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영화들, 우리는 취향이 다르다.



 그러다가 가끔씩 둘 다 재미있게 보게 되는 작품들을 발견하면 정말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다른 취향의 두 사람을 매료시킨 작품이니 높은 평점을 찍게 된다. 우리 둘 다 인상 깊게 본 멜로 영화가 바로 '첨밀밀'이다. 우리는 이 영화의 뒷부분에 젊은 시절 좋아했던 가수의 죽음 소식 앞에서 예기치 않게 남주와 여주가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과 남주가 홍콩에 처음으로 올 때 기차에서 정신없이 잠들어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 뒤에 여주가 앉아있었다는 흑백 장면을 최고로 꼽았다. '쎄시봉'처럼 뒤를 끌고 보여주는 영화보다 적당히 여운을 남기며 상상의 여지를 주는 작품이 우리 취향에는 확실히 더 좋다. 


 또 얼마 전에 '대니쉬 걸', '블라인드 사이드'를 둘 다 흥미롭게 봤다.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는 보고 나면 공부를 하고 난 느낌이 들어 좋다. 얘기를 하다 보니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둘 다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둘 다 좋아하는 영화들의 공통점, 우리 취향의 교차점을 찾아보자면? 여전히 정리가 잘 안 된다. 




우리 둘 다 흥미롭게 본 작품






  남편과 취향이 비슷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편이 우연히 듣게 된 노래가 좋다고 알려주면 나도 반하게 되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남편 역시 보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영혼의 단짝처럼 느끼게 될까. 하지만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취향이 다른 서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대신 더 똑똑해지기로 했다. 내 모습만 들여다 보고 내 취향을 설명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는데 남편의 취향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판단해보니 내 취향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것도 분명한 발전이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아직도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더라.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서는 대체로 남주와 여주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가 혼자 있었다면 절대 보지도 않았을 영화나 절대 듣지도 않았을 음악을 남편 덕분에 접해보며 내 시야가 점점 넓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도 왓챠 플레이 영화 목록을 보며 우리 취향의 교차점을 찾아보는 일에 도전해본다. 쌈빡하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 어딘가에 또 숨어있을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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