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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May 05. 2020

저는 실패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도전이 어렵지 않은 이유 

 준비, 땅!


 신호에 맞춰서 나란히 출발하지만 1초, 2초, 3초 시간이 지날수록 나만 뒤에 남는다. 점점 멀어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팔을 더 힘껏 움직여보고 보폭을 키워보지만 언제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달리기를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체육 시간은 10년 이상 이어졌다. 초등학교 때는 담임선생님 재량에 따라 시간표에 배정된 것 이상으로 체육 활동이 많았는데, 그 시간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 한 구석에 상처로 남아있다. 걸핏하면 했던 개인 달리기, 이어달리기. 학년이 올라가면서 체육 교과의 중요성이 작아지는 변화가 내게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던 즐거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는 행복한 상상을 잠시 해보다가도 체육 시간을 떠올리면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젓게 된다. 체육 시간에 대한 내 진심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끔찍했다. 



천천히, 느리게 가도 괜찮다고 토닥여줬다면 좋았을 텐데






 못해도 즐겁게? 운동회가 되면 어김없이 대여섯 명이 나란히 서서 달리기 시합을 했고 일이삼 등은 손에 도장을 받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도장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그 도장이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모른다. 매번 골인 지점에 들어간 후 한동안, 어린 시절의 나는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달리기 기록은 고스란히 내신 성적에 반영되었고 매번 체육 과목은 기본 점수밖에 받지 못해 평균을 대폭 깎아먹었다. 심지어 중학교 때 나와 몇몇 친구들은 달리기 기록을 측정하고 체육 시간이 끝날 때까지 엎드려뻗쳐를 해야 했던 적도 있다. 100미터를 20초 안에 뛰지 못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운동을 못하는 게 정신력의 문제라고 치부했고, 덕분에 나는 열심히 발버둥 쳐도 의지가 나약하고 의욕이 없는 학생 취급을 받았다.


 못하면 노력을 해야지! 어린 시절의 나를 변호해보자면 맹세코 한 번도 열심히 달리지 않은 적은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는 하교 후 혼자 집 앞 학교 운동장에 가서 달리기 연습을 한 기억도 많다. 누군가에게서 달리기에 관한 조언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을 적용해보려고 노력했다. 가슴을 앞으로 한껏 내밀고 뛰어보기도 했고, 무릎을 더 높이 들어보기도 했고, 상체를 살짝 숙여보기도 했다. 어떤 자세로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기록을 보며 어린 나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빨리 달릴 수 있는 방법,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달리기를 못한다는 건 어린 시절 내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봐도 아이들과의 격차는 벌어지기만 했다. 10년이 넘게 반복된 달리기 시합에서 나는 늘 맨 뒷자리에 있었고 언제부턴가 그건 당연한 결과로만 느껴졌다.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 바닥난 자신감으로 앞서가는 친구들을 뒤에서 바라보며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 어른의 세계에서 흔히 언급되는 안타까운 깨달음들을 나는 너무 빨리 알아야만 했다. 


 이제 더 이상 체육시간은 없지만 어린 시절의 달리기만큼이나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 '그냥 뛰었는데 1등을 했네, 살살 뛰었는데 3등 안에 들어서 도장을 받았어.'와 같은 말은 내겐 장난으로도 주어지지 않았다. 대학 입시, 전공 공부, 취업, 연애, 결혼, 매년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는 직장 생활. 아직 그리 오랜 시간을 살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건, 앞으로의 인생 역시 쉽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이런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긍정적이라는 말을 들으며 웃는 얼굴로 어른인 척 생활할 수 있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 달리기 덕분이다. 지금의 스트레스와 상처에 시달리다가 주저앉기엔, 어려서부터 너무 일찍 실패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른이 된 뒤로 다가오는 위기들은 어린 시절 달리기 꼴찌에 비할 바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체육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출발 직전 골인점 앞에 서있는 선생님이 들고 있는 깃발이 내려갈 때마다, 내가 사라지거나 그게 억울하다면 이 지구별이라도 폭발해주기를 얼마나 간절히 빌었었는지. 그 아픔들을 떠올릴 때마다 내가 더 강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잊고만 싶었던 기억 하나하나를 이제는 더 기억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에 도전하는 일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생각이 난 김에 어린 시절 달리기에 관한 소설을 써볼까도 싶다. 완성이 되지 못하더라도, 책이라는 결과물로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나는 달리기 꼴찌인데, 이미 실패에 익숙한 나에게 또 하나의 익숙함이 더해지는 것뿐인데 그렇게 겁낼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이렇게 천천히 달려가는 과정에도 언젠가는 골인선이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우리의 출발선은 골인선의 다른 이름인지 모른다. 



골인의 다른 이름,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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