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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Sep 22. 2020

인생에도 규칙성이 있다면

수열의 규칙성이 깨져버리다

 2, 5, 8, 그러니까 그다음이 뭐야?


 휴대폰을 3년 넘게 사용하고 있다. 고2 때 처음 휴대폰이라는 것을 손에 넣은 이후, 의식적으로 날을 세지 않아도 2년이 넘으면 알아서 꺼진다든지 배터리가 팍팍 닳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수명이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연락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휴대폰으로 딱히 중요하게 하는 것도 없는데 어쩌다 보니 매번 최신 기종을 손에 넣곤 했다. 처음 사용했던 16화음, 별로 울릴 일도 없는데 벨소리가 다채로웠던 48화음, 신비로운 보라색이 감돌던 울트라 슬림폰, 그러다가 스마트폰으로 세 번째 사용하고 있는 게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바로 이것이다.


 이 폰을 구입한 직후에는 테크노마트에 가서 발품을 팔아 최신폰을 최저가로 샀다는 자랑을 여기저기 하기도 했었다. 어쩌다 보니 또 최신폰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사실 나는 가게에 발이 닿을 때마다 최신 기종인 8이 아닌 구형 7을 찾았다. 나는 원래 얼리어답터와는 수만 리쯤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폰이나 컴퓨터처럼 가까이 놓고 지내던 것을 떠나보내는 일에도 엉뚱한 감성이 터져 나와 아쉽다는 먼저 든다. 게다가 초반에 자주 사용하는 앱을 깔거나 심지어 배경화면을 바꾸는 것 같이 자질구레한 일들에도 번거롭다는 생각이 앞서는 귀차니즘에, 부정할 수 없는 기계치이기도 하다. 


 혼자 살았다면 작년에 이미 폰을 바꾸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게 이번 폰은 죽어가는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곤 했다. 게임이나 서핑을 하다가 갑자기 화면이 꺼지기도 하고 카톡 목록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르지도 않은 친구 화면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아 하루 두 번씩 충전을 하고 있지만 아직은 쓸 만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몇 주 전에 옆 자리 선생님이 초특가로 나왔다며 조금은 충동적으로 휴대폰을 구입하는 일이 있었다. 이 정도 가격이면 당장 쓰지 않더라도 사서 쟁여 놔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역시나 6개월은 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에 그렇지 싶었다. 남편에게 링크를 보내며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굳이 그 폰을 살 이유가 없었다. 내 폰은 아직 쓸 만하기도 하고, 나는 폰을 바꾸는 데 규칙이 있기 때문에. 2, 5, 8 그러니까 그다음은? 나는 수열을 배운 사람이니까 당연히 11을 사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지난주에 폰이 다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충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신차단 모드로 변경이 됐다. 몇 번이나 폰을 껐다가 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화가 안 걸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출석 확인이 안 되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거는데 신호가 가지 않았다. 껐다가 켜면 되겠지 생각하고 해 보는데 계속 먹통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남편에게 폰이 안 된다고(사야 된다고) 했더니 이 남자는 이번에도 고칠 생각부터 한다. 이게 내가 이번 폰을 3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이유였다. 자고 일어나니 어떻게 했는지 또 전화가 살아났다. 하지만 이러다가 한순간에 여기 저장된 것들이 다 날아가버릴까 봐 불안해졌다. 아주 수명을 다해버리기 전에 쉬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을 사야 할지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2, 5, 8을 썼으니 다음은 11이었다. 


 올초에 광고를 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수열의 규칙성이 깨지리라는 건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나는 11을 쓸 차례인데 회사에서는 11을 만들지 않았다. 2020년이라 20이라나 뭐라나. 크게 업그레이드된 듯한 느낌도 줄 수 있을 테니 10대를 건너뛴 것에 대해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20을 쓸 차례인데 4G 최저요금제를 사용하는 내겐 이번 규칙성을 따르는 일이 유난히 경제적 타격이 크게 느껴진다. 데이터를 한 달에 1기가도 채 사용하지 않는데 매달 이렇게 비싼 요금을 지불할 필요가 있을까. 


 규칙을 벗어나니 혼돈의 상태가 왔다. 무슨 휴대폰이 이렇게 종류도 많고 눌러보는 것마다 조건이 다를까! 왜 통신사들은 기존 고객들을 붙잡을 생각은 안 하고 신규 고객만 유치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것은 도대체 몇 가지 경우의 수일까. 출장을 갔다가 퇴근 시간보다 빨리 집에 왔다고 좋아했는데 몇 시간 동안 검색을 거듭하다가 나도 모르게 다리 쭉 뻗고 잠이 들어버렸다. 


 이미 수열의 규칙성은 사라져 버렸다. 납작한 모니터에 길쭉한 폰이 즐비한 화면을 띄워 검색을 이어가다가 문득 인생에도 규칙성이 있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몇 번 떨어졌으니 이번에는 붙을 차례라든가, 몇 번의 고난을 겪었으니 이번에는 행운이 다가올 차례라든가 하는 게 정해져 있다면 그 몇 번의 힘든 시기를 좀 더 가볍게 견뎌낼 수 있을까. 인생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싶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노력하고 성장하고 발전해가는 거겠지. 규칙성이 없기에 더 가능성이 있는 거겠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인생에는 규칙성이 정해지지 않는다. 


 저녁 시간이 되면서 다시 해가 졌다. 오늘도 밤은 어두울 거라는 규칙성 안에서 나는 이렇게 한 마리 하이에나처럼 새로운 휴대폰을 찾고 있다. 오늘이 지나가면 나는 또 규칙에 따라 하루만큼 나아갈 것이다. 


그 옛날 내 휴대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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