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리조 Oct 27. 2020

잠 못 드는 밤에 떠오르는 말

그 새벽의 깨달음 

 30대가 되고 이전보다 정서가 안정되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어려서보다는 조금 능숙한 느낌이다(물론 지금도 부족한 점 투성이지만). 결코 한 번도 같은 사건이나 상황이 반복되는 일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비슷했던 경험을 떠올려 이전보다는 차분하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알아차릴 때면 '오, 많이 컸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반대로 10대, 20대의 나는 정서적으로 꽤 많이 불안정했다. 별일도 없는데 어느 날엔 계속 웃음이 나오더니 또 어느 날엔 우울해서 돌아버릴 정도였다. 이런 내 모습에 '사춘기'라는 이유라도 붙일 수 있었던 건 정말 다행이었다. 


 억눌려 있던 10대 시절을 지나 20대가 되고 대학생 신분의 자유인이 되자 오히려 그 이전보다 정서적으로 더 많이 무너져 내렸다. 캠퍼스 드라마에 나오던 대학생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공부면 공부, 진로면 진로, 연애면 연애, 거기에 성인이라는 책임감까지 더해지니 어깨만 더 무거워졌다. 


 그 시절의 나는 21세기 젊은이답게 인터넷으로 많은 것들을 배웠다. 어떤 카페에서 어떤 글을 봤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좋아했던 사람보다 나를 좋아해 줬던 사람이 더 많이 생각난다'는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로맨스 드라마에서처럼 그럴듯한 삼각관계나 마음이 엇갈리는 관계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그 문장은 왠지 낭만적으로 느껴져 마음속으로 여러 번 곱씹어보곤 했다. 




 다른 부서 선생님의 실수로 뒤늦게 급한 부탁을 받았다. 평소 같으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해 드렸을 텐데 어디선가 나는 내년 전보 대상자라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을 들어버렸다.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다. 떠날 사람은 안 해도 될걸? 정도의 추측이었다. 정신도 없고 귀찮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메신저로 부탁하셨던 선생님께서 인터폰으로 또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대상자가 맞는지, 꼭 해야 하는지만 다시 여쭤보았다. 해야 될 것 같다는 추측 정도의 대답을 듣고는 두 개의 추측 중 내가 믿고 싶은 말을 믿어버렸다. 나는 그 부탁을 안 들어줘도 된다고. 그러고 나서 일이 좀 커져버렸다. 여러 번 부탁을 했는데도 내가 안 해주려는 것처럼 되어버려 부장님과 교감선생님까지 나를 찾으셨다. 


 오해를 풀고 퇴근하기는 했는데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무거웠다. 일이야 하다 보면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고 이렇게 뒤늦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청해야 할 일이 있는 건데, 속사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나의 태도는 그냥 '여러 번 부탁했는데도 안 들어주더라'로만 보일 것 같았다. 게다가 부탁하셨던 그 선생님과는 평소에 말도 몇 마디 나눠보지 않은 사이였기에 더 오해하기 쉬워 보였다. 


 한 번 잠들면 알람이 울릴 때까지 좀처럼 깨는 법이 없는데 무슨 일인지 새벽에 조금 일찍 잠에서 깼다. 1분이라도 더 자고 싶어 눈을 감고 뒤척이는데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알람 소리와 함께 시작될 하루를 생각하니 어제 일이 떠올랐다. 그 선생님께 꼭 해야 되는 거냐고 묻고 내가 하고 싶은 말들만 늘어놓았던 통화 내용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이 이런 거라니. 어제 행동에 대해 내가 그 선생님께 꽤나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아직도 이렇게 소심한 사람인가 싶어 피식 웃었다가 죄짓고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는 기분이 나빠 한참을 씩씩거리고 남편 앞에서 험담도 잔뜩 늘어놓는다. 하지만 밤에 잠이 안 온다거나 자다가 깨서도 생각했던 적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받은 상처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또 후회할 거리를 만드냐고 생각하다 보면 역시나 상대방이 사과를 해오는 경우가 많았다. 


 내 거절에 언짢았을 선생님 뒤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런저런 생각이 이어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었을 말과 행동들, 내가 먼저 지키지 않은 약속 등, 30년 넘게 살아오며 마음에 가지고 있는 짐들을 하나씩 꺼내봤다. 주위 사람들과 깊은 관계는 맺지 않을지언정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좋아했던 사람보다 나를 좋아해 줬던 사람이 더 많이 생각난다'는 그 옛날 인터넷 카페의 글에서 본 문장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준 상처가 더 많이 생각난다.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들지 못했던 밤을 떠올리며 이번 글을 쓰다가 생각난 노래를 같이 올려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주말은 어디로 흘러간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