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 29일
사고의 낌새
1992년 12월 29일
일기를 너무 늦게 쓰게 된 것이 조금 미안하구나. 우선 네 출생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지?
엄마와 아빠에게 네가 찾아온 날은 1992년 4월 10일이었단다. 아마도 깜깜한 밤이었을 거야. 후후후.
매달 1회씩 병원에서 초음파로 너의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느꼈던 것들은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어.
아주 작고 까만 콩처럼 보이던 것이 점점 커지더니
머리와 심장, 팔과 다리가 되고 사람 형상을 갖추어 가더구나.
비로소 꿈틀꿈틀 태동을 시작하는 것이 보였을 때 가슴이 터져버리는 줄로만 알았다.
결혼 후 처음 얼마간은 직장에 다녔었어. 물론 네가 뱃속에 있는 동안에도 말이야.
엄마는 일하면서 움직이고 골몰히 생각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바로 태교라고 생각했거든.
"한샘 교육용 VTR 대작"을 촬영했단다.
시나리오 작성, 연출, 편집, 녹음에 이르기까지 정말 대 장정의 길이었어.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보험회사에 입사하게 되었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극성인 것 같아.
사실 엄마에게 작은 걱정이 생겼단다.
예쁘고 건강한 아가였던 네가 별안간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모해버리는 꿈을 꾸곤 해.
괜한 걱정인 걸 아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생각처럼 되는 게 아니잖아.
이런 속상함은 네가 커서 임신을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거야.
내가 이런 꿈을 꾸는 건 아마 네 태동이 적어서 생기는 불안 때문인 것 같아.
엄마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태동이라는 건 본디 힘차게 느껴진다던데 난 그렇지 않았거든.
불안감에 원래 다니던 병원 원장님 소개로 동산 성심병원을 찾아갔단다.
하지만 심장박동을 검사하는 동안에도 너는 한 번 제대로 움직여 주질 않더구나.
똑바로 누운 자세에서 요지부동이었어. 결국 검사 날짜를 미룰 수밖에 없었지 뭐니.
허탕을 쳤다는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온 일요일, 무료함에 TV를 틀었어.
혜성 같이 등장한 신예 아이돌인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를 부르고 있었지.
조명이 번쩍이는 무대에서 빠른 비트로 랩을 쏟아내는 그에게
열광하는 소녀팬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신명이 나더구나.
그런 내 마음과 통한 걸까? 쿵짝쿵짝 리듬에 맞춰 네가 잘 움직여 주는 게 아니겠어?
'너도 서태지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마음에 귀여우면서도 대견했단다.
이렇게 씩씩하게 움직일 수 있다니 다행이라며 안심했어.
그러나 그 움직임이 어떤 뜻이었는지,
그때는 사고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단다.
LEN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이너
인스타그램: lotus_hee_illust
메일: choyeonheee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