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동반자 술 이야기

#맥주 #추억

by 스텔라박

나의 동반자 맥주(아니, 술) 이야기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술’을 좋아한다. 소주, 맥주, 막걸리, 위스키 등 주종을 가리지 않고 적절한 안주와 함께라면 술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내 인생 첫 술은 대학 입학을 앞두고 광주의 ‘프로방스’에서 J와 함께한 잎새주였다. 프로방스는 까페 겸 술집이자 J의 아지트였는데, 원래는 소주를 팔지 않지만 그 날은 특별히 주인장 언니가 편의점에서 소주를 사와서 마시는 걸 허락했다. 마른안주에 잎새주를 마시는데, 간이 신선해서인지 술이 하나도 쓰지 않고 꿀렁꿀렁 잘 넘어갔다. 그렇게 나의 20년 음주 인생이 시작되었다.


삼십 대 초반에 J와 연락이 끊기기 전까지 나와 J는 소울 메이트이자 알코올 메이트였다. 대학에 막 입학하여 인천에 살게 되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J와 종종 만나 술을 마셨다. 20대 초반에 우리는 신촌의 ‘하늘’ 이라는 술집과 ‘포토제닉’이라는 술집을 오갔다. 그 둘은 지하에 음감실 비슷한 곳이었는데, 큰 스크린에 뮤직비디오가 계속 재생되었다. 주로 맥주를 팔았는데 안주가 말도 못하게 쌌다. 맥주를 많이 시킬수록 안주가 싸지는 집이었다. 예를 들어 하이네켄 6병을 시키면 소세지 야채볶음이 원래는 6900원이지만 1900원이 되는 식이었다. 나는 J와 이건 마실수록 이득이다! 라는 마음으로 주구 장창 맥주를 마셔댔다. 주로 하이네켄, 버드와이저, 주머니가 조금 여유 있으면 호가든을 마셨다.


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내가 근무하는 지역으로 발령을 받으며 나와 J는 새로 생기기 시작하는 수제 맥주 집들을 다니기 시작했다. IPA, 페일 에일 등의 수제 맥주는 다양한 향과 맛이 있어 입이 즐거웠다. 최근에는 수제 맥주가 일반화 되어서 원하는 때 언제든 편의점에 가면 마실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랍기도 하고 즐겁다.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수제맥주 파는데가 드물어졌다. 일산에는 유일하게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가 남아있는데, 비싼 가격 때문에 쉽사리 가지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파는 수제맥주가 충분히 대체제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엔 어디든 단골로 만들어버리는 J 덕분에 안주가 맛있는 J의 단골 맥주집을 한창 다녔다. 그 중 홍대에 있던 ‘들꽃이 피던 자리’라는 술집의 밥 전이 아직도 종종 생각날 때가 있다. 그 곳은 J의 오래된 남자친구의 지인이 하는 가게였는데 기본안주부터 메인 안주까지 너무나 맛있었다. 밥 전이지만 막걸리는 당연히 어울리고 맥주도 어울렸다. 고소한 그 맛이 아직도 입에 맴돈다.


J의 일방적인 연락 두절로 나의 소울 메이트이자 알코올 메이트가 사라졌음에도 나의 음주 인생은 계속되었다. 주로 친해진 직장 동료들, 그리고 남자 친구와 함께였다. 때때로 소주를 마시고 종종 맥주를 마셨다. 남자 친구와는 위스키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주종은 소맥으로 안착했다. 지금은 언제든 회식을 할 때면 맥주에 소주를 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소주의 양을 조절해서 제조한다. 나는 술에 쉽게 취하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는데, 맥주만으로 쉽게 취하지 않아 가성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배부르고 취하지도 않는 건 참 슬픈 일이다. 그런데 소맥은 맥주의 청량감을 맛보면서도 적당한 취기가 올라오는 게 딱 이다. 하지만 넋 놓고 마시다가 흠뻑 취해서 끌려나가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처럼 나의 음주 인생을 되돌아보며 나에게 술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내 인생에서 술은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내 청춘의 고뇌와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술과 얽혀있었다. 물론 과도한 음주나 중독은 위험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넘어가진 않았다고 자부한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데 술은 굉장히 좋은 윤활유다. 나는 술을 마시고 적당히 취하면 살짝 기분이 좋아지며 상대방과의 어색함이 풀어진다. 단, 과도하게 마셔서 다음날 기억이 안 날때면 다시 어색하고 예의를 차리곤 한다. 그래도 그렇게 한 번, 두 번 술을 함께 마시다 보면 어느새 그 사람과 술을 마시지 않고도 농담을 주고 받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면 그 즐거움이 더욱더 빛을 발한다.


술을 마실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블랙 아웃이다. 전날 회식을 거하게 하고 집으로 돌아와 쪽잠을 자고 난 후 다음 날 아침,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생각이 퍼뜩 들며 벌떡 일어날 때가 있다.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혹시 내가 실수를 하진 않았나 하는 걱정에 출근해서 마치 죄인처럼 같이 술 마신 사람들을 찾아간다.

“혹시 제가 어제 실수 안 했나요?”

안절부절 못하며 물어본다. 다행히 지금까지 음주 인생 동안 술 마시면 목소리가 커지고 온 세상이 떠나가게 웃는 것 이외의 사고는 치지 않았다. 술버릇이 나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닌가?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은 걸까? 하는 불안감이 갑자기 나를 엄습한다. 하지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잊기로 한다.)

나와 비슷한 동료가 있는데 우리는 술 마신 다음날 서로를 찾아가 ‘나 실수 안 했니?’ , ‘저는 실수 안 했나요?’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우리 이럴꺼면 몸에 캠코더 하나씩 달고 술을 마시자며 한숨을 푹 쉰다.


코로나 시절엔 회식이 사라지고 친한 사람들과의 술 모임도 사라져서 집에서 혼맥을 주로 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도 최고치였을 시절이라 퇴근길에 맥주 4캔 만원 어치를 사와서 500미리 맥주를 한 두캔씩 매일 같이 마셨다. 그것 때문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잘못된 식습관 때문인지 몰라도 22년 1월에 장의 선종을 세 개나 떼어냈다. 대장 내시경을 연달아 무려 두 번이나 하며 질려버려서 그 후로는 술을 조금씩 자제하려고 한다. 맥주는 너무나 쉽게 마실 수 있어서 더 위험하다. 특히 4캔 만 이천원(요즘엔 가격이 올랐다.) 짜리는 한번 보면 포기할 수 없다. 그래도 요새는 꼭 마시고 싶을 때 맥주를 한 캔씩만 사서 귀가한다. 언제든 맛있고 많이 마실 수 있는 술이지만 이것 또한 지금 건강할 때 할 수 있는 소리다.


나는 인간이 평생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젊어서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오래 마시기 어렵다. 나는 나이 들어서도 술이 고플 때 한 잔씩 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선 지금은 적당히 마셔야 한다. 매일 맥주를 마시는 대신 한 달에 서너 번 있는 술 모임 때 최선을 다한다. 참았다가 마시니 더욱 꿀맛이다. 적당한 비율로 만 소맥을 맛있는 안주와 좋은 사람들과 먹을 때면 세상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지나치지 않게, 적당히 즐기며 오래 마시자고 오늘도 다짐한다.


이렇게 술에 대해 쓰다보니 술이 땡긴다. 아무래도 오늘 집에 갈 때는 오랜만에 맥주 네 캔을 사가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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