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와 같은 공간, 야쿠모사료
(<일본어 저널>에 연재했던 글을 각색, 보완하였습니다)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밤을 사랑했다. 밤의 고요함을, 깊이를, 포근함을. 도시의 불빛과 소리가 사라지고, 적막함 속에서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낮에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처리하고 나서, 새벽의 어스름을 지나 붉은 해가 명징하게 지평선에 걸릴 때 즈음 잠들길 좋아했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에 아침형 인간이라는 자들이 갑자기 등장했다. 아침이 가진 무궁한 잠재력을 설파했다. 밤을 사랑하는 자들은 침묵했다. 그런데 미라클 모닝이라는 말이 또 등장한다. 밤을 사랑하는 자들은 여전히 침묵한다. 나는 요즘도 종종 밤을 탐닉하곤 한다. 특히 주말에 말이다. 그러다 보면 느지막이 일어나서 침대에서 책을 읽고, 넷플릭스를 보고, 우버로 배달음식을 시켜 먹다 보면 해가 지는 허무함을 느끼기도 한다. 고백하건대, 그런 날은 아침형 인간으로 살고 싶다. 일찍 아침을 맞이하는데 약속을 잡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아침식사를 예약하곤 한다. 밖에서 아침식사를 하면 하루가 길어지는 마법이 일어나는 것 같다.
야쿠모사료
八雲茶寮
여덟 개의 구름이라는 의미의 야쿠모사료八雲茶寮. 세타가야구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레스토랑임을 알리는 것은 대문 앞에 있는 작은 입간판이 전부라서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도쿄와 교토의 이솝 매장, 안다즈 호텔, 레스토랑 히가시야마, 화과자 전문점 히가시야 긴자, 의류점 블룸 앤 브런치 등의 공간을 디자인한 유명한 일본 디자이너, 오가타 신이치로가 프라이빗한 콘셉트로 만든 다이닝 클럽이다. 그는 일본의 전통을 살려 지금 세대에도 그 문화를 전하고, 전통과 혁신이 만나는 곳, 바쁜 도시의 복잡함으로부터 벗어나서 몸과 마음이 잠시 쉬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아침과 점심은 예약제로 운영이 되고, 저녁에는 본래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개방을 하는 프라이빗 클럽이다. 현대적이지만 일본의 전통이 담겨 있는 공간을 만드는 디자이너, 그가 구상한 아침식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정확히 9시 정각이 되자 직원이 정문을 열었다. 계단을 올라 심플한 로고가 그려진 노렌을 지나자 아담한 마당에 도착했다. 모양도 크기도 각기 다른 개성 있는 식물이 작은 마당 곳곳에 피고 자랐다. 작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늦은 가을이었는데, 처마에 주렁주렁 걸린 곶감을 보며 계절의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졸졸졸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 단정한 내부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유리창, 고개를 뒤로 꺾어야만 볼 수 있는 우뚝 선 소나무, 모든 디테일이 흥미로웠다. 방문객들은 복도에서 안내를 기다렸다. 고운 볕이 유리창을 통과해 발끝에 닿았다.
직원을 따라서 티룸으로 들어갔다. 소박하고 단정한 공간은 예스러우면서도 모던하다. 가로*세로 2 미터 정도 크기의 정사각형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고, 화려함은 없었지만 공간을 채우는 소품에서 멋스러움이 묻어났다. 공간을 비우고, 유행과는 상관이 없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멋스러울 것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테이블 한 켠에서는 독 득한 디자인의 냄비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그 뒤로는 큰 창이 하나 있었는데, 식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우리는 창 밖의 풍경에 집중했다. 푸른 나무와 작은 연못, 그리고 연못에 날아든 초록새의 지저귐과 연못에 몸을 씻는 모습까지 식사를 하러 온 모든 사람들이 그 풍경에 집중했다. 고요했다. 그래서 모든 자극에 집중했다. 느렸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계절을 대표하는 차로 시작해서 말차로 끝나는 아사차朝茶라는 이름의 아침식사 코스는 2시간 동안 진행되며, 음식을 제외하고 인테리어 사진을 찍지 말아 달라는 안내를 받았다. 과연 아침 식사가 2시간 동안 가능할까?
아마자케甘酒를 먹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슈퍼마켓에서 볼 때마다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경상도 출신의 할머니는 늘 식혜를 단술 또는 감주라고 부르곤 하셨는데 甘酒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감주이기 때문에 나는 막연히 아마자케가 식혜와 비슷한 맛일 거라고 상상하곤 했었다. 맛은 전혀 달랐다. 아마자케는 막걸리처럼 불투명했고, 식혜보다 걸쭉했다. 그리고 쌀의 맛이 강했다.
직원이 쌀을 담아 와서 끓고 있는 냄비에 붓고, 쌀의 산지와 품종을 설명했다. 우리는 예술가의 행위예술을 보러 온 관객처럼 직원의 행동에 집중했다. 더운물로 찻잔을 데우고, 찻잎에 물을 붓는 과정은 정성스럽고 절도가 있었다. 모두가 집중을 하며 바라봤다. 초록색 찻잎이 벚꽃 잎과 함께 투명한 찻주전자 안에서 피어났다. 냄비 안의 쌀이 미음에서 맑은 죽이 되고, 또 된죽이 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맛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몹시 특별했다.
일본식 아침식사는 소박하고 정갈했다. 죽과 함께 일본식 계란말이, 말린 생선, 톳, 멸치, 시오콤부, 우메보시, 채소찜과 채소절임, 미소수프 등등 특별하지 않은 재료였지만 그것을 제공하는 방식, 설명하는 방식, 담는 방식 등이 모 든 것을 특별하게 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적 디테일이 한데 섞여 일본 스러운 것을 일종의 의식처럼 만들었다.
식사를 마치자 직원이 삼단으로 된 대나무 찬합을 들고 와서 내 앞에 차례로 펼쳐 놓기 시작했다. 안에는 여섯 종류의 와가시(화과자 和菓子)가 있었다. 하나하나 설명을 듣고 무엇을 먹을지 골라야 하는데, 생김새가 예뻐서 하나만 고르려니 결정 장애에 시달리게 되었다. 결국 추가금을 내고 두 개를 골랐다. 와가시는 초록 거품이 풍부하게 일어난 말차와 함께 나왔다. 찻잔은 왜 이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지! 누구라도 이곳을 다녀간다면 이런 친절과 정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야쿠모사료를 나와서 시계를 보니 시간은 11시였다. 곧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야쿠모사료는 단순이 음식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방식을 경험하는 공간이었다. 단순히 허기를 달래기 위한 식사가 아니라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차려낸 한 끼의 식사, 그리고 일부러 시간을 들여 모든 과정을 음미하는 여유. 제대로 차려낸 한 끼의 식사가 어떻게 다시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지, 그리고 모든 게 귀찮고 지루 한 보통의 일상을 우아하고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지 배우는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