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2017 오스카 작품상에 빛나는 베리 젠킨스의 <문라이트>
내 안에 존재하는 '나'라는 정체성, 사람들은 자신마다 그 존재와 마주한 적이 있을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진정한 나의 모습'과 마주하기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까?"
"내면에 숨겨진 나를 꺼내기 위한 용기는 있는 걸까?"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자기가 되기 위한 길고 긴 투쟁 그리고 그 과정, <문라이트>는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기 위한 한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다.
<문라이트>는 국내 개봉 전부터 화제였다. 소년의 성장기와 함께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고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 결과 2017년 골든글로브에서 작품상을 수상했고 이어 미국 현지시간으로 26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극 중 샤이론의 절대적인 지지자, 후안 캐릭터를 연기한 마허샬라 알리는 남우 조연상을 손에 쥐었다.
그 밖에도 시카고 비평가 협회상, 뉴욕 비평가 협회상 등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아 150개가 넘는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포스터 위로 적힌 '139관왕'이라는 키워드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 아래 작성 글에는 스포일러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해주세요.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한 과정, 한 소년의 성장기
1. 리틀 : 마이애미의 어느 작은 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샤이론(알렉스 히버트)은 '리틀'이라 불린다.
그 별칭은 샤이론의 외형을 그대로 부르는 듯, 작고 말랐다. 말수가 적은 샤이론은 묻는 말에도 잘 대답하지 않아 이름을 말하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마약 중독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엄마 폴라(나오미 해리스) 그리고 아빠라는 자리의 부재가 어쩌면 지금의 샤이론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샤이론은 후안(마허샬라 알리)의 창고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후안과 마주친다. 후안과 후안의 여자 친구 테레사(자넬 모네)는 샤이론에게 음식을 건네주곤 대답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말을 건다. 후안에게 샤이론은 마치 아들 같았고 샤이론에게 후안의 모습은 아빠와 같이 듬직했던 모양이다. 아주 천천히 샤이론은 후안에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어간다. 샤이론의 이런 모습을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후안은 샤이론에게 절대적인 지지자였다.
반면 엄마는 아들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엔 내팽개쳐지는 샤이론에게 엄마는 그 자리만 지킬 뿐 부재(不在)한 아빠의 자리와 다를 바가 없다.
2. 샤이론 : 어느새 10대 청소년이 되어버린 샤이론(애슈턴 샌더스)은 질풍노도의 시기 속에서 케빈(제이든 파이너)으로 인해 애틋하고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샤이론을 늘 괴롭혀왔던 같은 반 아이들로 인해 이들은 한순간에 멀어진다. 하나뿐이었던 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겠지만 그 둘은 그렇게 갈라졌다.
어린아이에서 청소년기를 그 누구보다 외롭게 지내왔던 샤이론의 성장 속에서 주변 인물들이 보이는 광경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샤이론의 지지자였던 후안은 마약에 빠져있는 샤이론의 엄마에게 마약을 팔고 있다. 단 하나뿐이었던 친구 케빈으로부터 동성애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지만 오히려 변화의 계기로 작용한다. 샤이론 자신에게 있어 증오와 사랑이 뒤섞인 '애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그들이지만 이 역시 '샤이론 자신'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3. 블랙 : 샤이론의 과거는 그렇게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주변 인물과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 그렇게 샤이론을 바꿨다. 근육질의 체격에 금목걸이와 금니로 치장한 청년 샤이론(트레반테 로데스)은 외형적으로 크게 변모했다. 이게 같은 사람인가 느낄 정도이지만 그 말투와 행동, 눈빛은 여전히 그대로다.
가난과 폭력으로 얼룩진 불우한 환경 속에서 샤이론은 나름대로 살아갈 길을 선택했고 누가 건드리지 못하도록 강해져갔다. 그가 힘들었을 때 손을 내밀어 준 후안과 케빈의 존재, 그를 괴롭혀왔던 주변의 상황들이 현재의 샤이론을 만들었다.
오래간만에 만나게 된 케빈과 샤이론.
갈라졌던 둘 사이가 다시 달라붙기라도 한 듯 조금은 어색하지만 어느새 묘한 감정과 기류가 흐른다. 샤이론의 현재 모습에 과거 케빈에게 기댔던 청소년기의 샤이론이 오버랩된다.
"넌 누구야?"
"난.. 그저 나야"
오랜 침묵으로 둘의 표정이 한참 동안 이어진다.
달빛 아래 흑인 소년들은 모두 파랗게 보인다
마이애미 출생의 각본가 타렐 알빈 맥크래니가 쓴 연극 <달빛 아래에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를 <문라이트>로 각색해 만들어졌다. 원작자인 맥크래니와 이 영화를 연출한 베리 젠킨스 그리고 이 영화 속에 등장한 캐릭터 모두가 흑인이다.
샤이론을 괴롭히는 학교 아이들도 모두 흑인, 샤이론 자신도, 엄마도 후안도 케빈도 모두 흑인이다. 유색인종과 성소수자라는 측면 모두 '비주류'로 통하지만 영화에선 오롯이 드러난다.
그러나 '달빛 아래 흑인 소년들은 모두 파랗게 보인다'는 표현처럼 그들의 색깔은 감추고 성 정체성과 나를 찾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문라이트>는 한 사람의 성장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장'이라 함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과정이다. 외적인 성장보다 내적인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샤이론은 얼마나 자랐을까? 그렇게나 작았던 몸집에서 근육질의 체격으로 변모해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어린 샤이론의 모습과 눈빛이 여전히 변함이 없는 것을 보면 내면적으로는 샤이론의 영혼 그대로다.
샤이론의 소년-청소년-청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세 명의 배우가 연기했음에도 흔들림이 없다는 것 자체도 주목해볼 만하다. 때로는 고요한 침묵으로, 때로는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눈빛에 담아 이야기한다.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해!"
후안은 어린 샤이론에게 그렇게 말한다. 남에게 미루지 말라고. 어차피 내 인생은 나 자신이 개척해나가는 것. 아무도 그 결정을 대신해줄 수 없기에 후안이 말하는 '조언'은 나 그리고 성장을 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결국 이 영화는 샤이론의 성장기이자 그 성장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 그리고 달빛 아래 존재하는 우리 인생사를 응원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거머쥔 <문라이트>
89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호명하러 나온 미국의 영화배우 페이 더너웨이와 워렌 비티.
그들 손에 들려있던 봉투 속에는 '라라랜드'가 적혀있었고 그 아래 엠마스톤의 이름이 있었다.
엠마스톤은 <라라랜드>로 여우주연상을 손에 쥐었고 작품상이 호명되어야 할 그 순간에 워렌 비티는 여우주연상 수상자 카드를 들고 있던 것이다. 당연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워렌비티. 옆에 있던 페이 더너웨이가 <라라랜드>를 외쳤다.
결국 <라라랜드> 제작진은 무대로 올라가 정정 발표가 있기까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감까지 이야기했다.
기쁨도 잠시, <문라이트>가 작품상 수상이라는 정정 발표를 했지만 '농담이 아니다. <문라이트>가 작품상'이라고 몇 차례나 이야기, 급기야 작품상 수상작이라는 카드까지 전 관객들을 향해 펼쳐 보였다.
이는 어마 무시한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무려 82년이나 담당해왔던 글로벌 회계컨설팅기업인 프라이스하우스워터쿠퍼스(PWC)는 이 사건으로 인해 오랜 기간 공들여온 명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89회 아카데미에서 <문라이트>는 작품상을 비롯해, 각색상과 남우조연상을 가져갔고 경쟁작이었던 <라라랜드>는 감독상을 비롯, 여우주연상, 음악상, 주제가상, 촬영상, 미술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