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제시카 차스테인의 거침없는 핵직구 <미스 슬로운>
나는 살면서 무엇인가를 쟁취하기 위해 어떤 싸움을 했을까? 현실에 안주하며 그저 맹목적으로 승리를 기원했던 건 아니었는지 괜한 반성을 해보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노력을 한다. 정성을 다한 피와 땀. 이윽고 정상에 올라 깃발을 꽂을 때까지 고통을 감내하고 경쟁자들을 물리친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 고독해 보일지라도 승리의 참맛은 달콤한 법.
"내 임무는 이기는 거고 어떤 수단이든 사용할 책임이 있어!"
제시카 차스테인이 연기한 미스 슬로운은 거침이 없다. 위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하나의 문장이 단순하게 느껴지리만큼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니 직접 확인하는 게 가장 최선일 듯하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많은 대사들은 슬로운의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전략과 연동되어 관객들을 향해 묵직한 돌직구를 던진다.
걸 크러시가 무엇인지, 핵직구라는 말이 무엇인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몸소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래 작성 글에는 스포일러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3번째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작성된 글입니다.
신념 있는 로비스트는 승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로비스트(lobbyist)라는 키워드가 국내에서는 정치적 사건에 비일비재하게 쓰였기에 딱히 긍정적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로비스트 자체가 금지되어 있어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실제 수만 명의 로비스트들이 워싱턴의 정치계와 함께 프로젝트를 하고 있고 그 파워 역시 무시무시하다고 알려져 있다. 제시카 차스테인은 워싱턴가에서 활약하고 있는 11명의 로비스트를 만나 <미스 슬로운> 제작을 위한 트레이닝을 하기도 했단다. 그 훈련은 꽤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잘 나가는 로비스트가 빙의라도 한 듯 느껴졌으니 말이다.
"슬로운은 얼음이 변해서 사람이 된 거라며?"
슬로운은 차가운 얼음 같은 존재다. 너무너무 촘촘해서 무너지지 않을 듯 조금의 빈틈도 없이 일을 하고 짜여진 계획대로 업무를 처리한다. 어쩌면 그렇게 보인다고 언급하는 것이 가장 올바를 것 같다.
하루하루 일에 치여 사는 그녀에게 단 1시간 아니 단 1분의 잠도 사치인 듯 각성제를 먹어가며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는 전형적인 워커홀릭(Workaholic)이다. 화장을 지우고 침대에 몸을 기대는 것도 잠시,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립스틱을 바르고 분칠을 하며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회사로 출근해 프로젝트를 마무리한다. 반듯하고 예외는 없을 듯 철두철미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승리라는 단어가 살짝 스쳐 지나가며 '믿으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온 나라가 총기 규제 법안으로 연일 시끄러운 가운데 슬로운에게 새로운 프로젝트가 떨어졌다. 슬로운은 총기 규제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그녀의 회사는 총기 규제 법안을 반대하는 쪽의 일을 맡게 되었다.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운데 총기 규제를 반대한다고?' 깔깔대며 박장대소하는 그녀의 웃음은 거대한 권력을 가진 클라이언트를 당황케 할 만큼 당차다.
"신념 있는 로비스트는 승리에만 연연하지 않는다"
슬로운의 신념은 강했고 승리보다 소신을 선택해 오히려 반대편에 서게 된다. 그녀는 그렇게 총기 규제 법안 '히턴-해리스(Heaton-Harris)'를 지지하는 회사로 들어가 신념 하나만을 가지고 싸움을 시작한다.
정치게임에 온 몸을 내던지는 슬로운
'히턴-해리스' 법안을 지지하는 작은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한 미스 슬로운. 그녀의 치밀한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다. 법안을 지지하는 의원들의 표를 끌어모으기 위해 슬로운은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일하게 된 회사 대표 슈미트(마크 스트롱) 역시 '말로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이야'라는 표정과 행동을 보인다. 그만큼 슬로운의 전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쩌면 슬로운이 설계하는 광범위하고 철저한 전략은 팀원들이 따라가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갸우뚱해야만 하는 부분들이 존재하리라고 본다. 때에 따라서는 도청도 하고 미행도 서슴지 않는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뿌리를 잘라내는 방식 또한 그녀가 차갑고 냉정한 얼음덩어리처럼 느낄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정치계에 있어 하나의 표가 좌우하는 승패에는 정해진 규칙도 없고 어디까지가 적법이고 범법인지 한계 또한 불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슬로운을 우리 편에 세워둔 채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또 따라간다. 적어도 필자는 그랬다. 마치 마녀에 홀린 사람처럼.
'과한 것은 아닐까?' 때로는 분명한 '과유불급(過猶不及)'처럼 느껴짐에도 슬로운은 팀원의 트라우마를 아주 교묘하게 이용하고 상대방의 약점을 끝까지 파헤쳐 자신의 승리를 위한 아이템으로 활용한다. 자신이 설계한 전략에 온 몸을 내던지는 것을 보면 눈 앞의 승리보다는 올곧은 신념이 앞서고 치밀한 전략을 위해서는 과감한 승부수가 통찰력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빈틈없는 전략으로 가득 찬 러닝타임 132분은 화끈하고 짜릿했다.
화끈하고 짜릿한 사이다! 그 이면에는...
미국의 총기 법안과 정치계 그리고 미국 의회 안건에 따른 법률과 이를 다루는 언론. 사실 우리나라의 체계와 너무도 다른 측면을 보이고 있는 데다가 슬로운이 가진 로비스트라는 전문직도 낯설게 느껴졌으며 총기 법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비스트의 표심 쟁탈전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다 보니 잠시 딴생각을 하면 어느 순간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 영화는 관객들의 영혼을 빨아들이듯 강한 흡입력을 가졌다.
'기승전결'로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의 전개가 슬로운의 거침없고 속사포 같은 언변과 함께 어우러져 상대방을 제압하는 모습을 볼 때면 이만한 '사이다'가 없다고 느끼게 된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의 양심을 꿰뚫는 슬로운의 통렬한 비판의 메시지는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심금을 울린다.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없을듯한 슬로운은 누구보다 고독하고 외로워 보인다.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면 눈 앞에 보이는 모두가 그녀가 물리쳐야 할 상대라도 된 듯 대응하는 모습이 강박관념이라는 측면에서 안타까움마저 느껴진다. 보통의 회사에서 어제 있었던 드라마나 스포츠를 화제로 이야기 꽃을 피우고 동료와 함께 밥을 먹고 술 한잔 즐길줄 아는 평범한 삶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다보니 이쯤되면 그녀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화끈하고 짜릿한 한방 그리고 그녀의 예리한 카리스마 이면에 이러한 측면이 느껴지니 미스 슬로운의 승리는 그 누구보다 고독하면서 가치있고 통쾌하면서 씁쓸하기까지 하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슬로운이 얼마나 영리한지 또 얼마나 예리한지 고스란히 드러내는 플롯을 구축하고 있다. 슬로운의 전략과 탄탄한 각본의 틀에는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들도 포함하고 있는듯하다. 나도 한방 먹었으니까. 정치인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치는 카타르시스는 어마무시하다.
※ 위 글에는 스포일러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3번째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