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극사실주의 영화 <덩케르크>
1939년 9월, 이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목숨이 희생된 파괴적인 전쟁이 일어났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국경을 침공한 이후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되었다.
프랑스의 덩케르크(Dunkirk) 지역. 1940년 당시 이 곳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 등 약 40여만명이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수세에 몰리게 되면서 위기를 겪었다. 앞으로는 바다가 있었고 뒤로는 독일군이 있었다. 피할 곳 없는 연합군은 구출만을 기다렸다.
영국 해군이었던 베트럼 램지(Bertram Ramsay) 중장이 도버 성(Dover Castle) 지하 어느 방에서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에게 구출 작전에 대한 개요를 설명했다. 그 방의 이름은 다이나모 룸이었고 구출 작전명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당시에 있었던 기적 같은 실화를 아이맥스(IMAX) 카메라와 수천 명의 엑스트라 및 2차 대전에 쓰였던 전투기 스핏 파이어까지 동원해 전쟁의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려냈고 자신의 필모그래피 위에 또 하나의 기적을 이뤘다. 그것이 바로 영화 <덩케르크>다.
※ 아래 작성 글에는 스포일러 요소가 다수 포함될 수 있습니다. 유의해주세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봐야 하는 절대적 이유
<스파이더맨>이 하늘을 날고 <47미터> 바닷물 속에서 상어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요즘이라는 시간 속에서 올해 기대작인 <덩케르크>가 개봉을 했다.
승승장구하던 <스파이더맨:홈커밍>은 691만명을 모아 역대급 스파이디로 자리매김했지만 예매율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그 자리에 <덩케르크>의 이름이 우뚝 올라서게 되었다.
※ <스파이더맨:홈커밍>의 관객수는 영화진흥위원회 7월 24일 기준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팬이었기에 이번 작품 또한 놓칠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같은 영화를 두 차례 이상 관람한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덩케르크>는 '반복 관람'이라는 단순한 의미 그 이상이었다. 화면비율로 따져 서로 다른 스크린을 통해 '일부러' 관람했다. 첫 번째는 일반 스크린 관람, 두 번째는 아이맥스 관람.
'무조건 아이맥스로 관람하라'는 감독의 조언은 '아이맥스로 촬영했으니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선사하는 아니 관객을 압도하는 시퀀스들을 생각하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실사 위주로 제작해 CG를 과감하게 줄였고 러닝타임 106분의 대부분을 아이맥스로 촬영했다고 한다.
아이맥스가 아닌 첫 번째 관람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시나리오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구성한 시나리오는 전쟁에 투입된 장군이 전략을 짜듯 완벽했다. 특히나 세 가지의 다른 타임라인과 공간을 교묘하게 섞었음에도 동일한 시간대에 펼쳐지는 듯 관객들을 향한 학익진이 펼쳐졌다. 관객은 감독의 철저한 시나리오에 놀랄 수밖에 없었고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을 스크린에 올려 마치 체험하는듯한 느낌을 선사해 한번 더 관객들을 압도했다. 절제된 연출과 빈틈없는 시나리오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전쟁 영화를 기대했던 일부 관객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도 존재한다. 영화라는 것은 본래 '개인의 취향'인 법. 양쪽으로 대립해 총을 쏘고 폭탄이 터지며 피가 튀기는 기존의 전쟁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2차 대전 배경임에도 방호벽 너머의 독일군과 흔한 전쟁 씬(Scene) 하나도 그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더구나 대사도 많지 않으니 <위워솔져스, 2002>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 같은 영화를 기대했다면 재미와 감동을 반감시키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을 듯하다.
두 번째는 감독의 추천대로 아이맥스 상영관을 찾았다. 이 영화는 아이맥스 카메라를 이용한 핸드헬드 기법까지 동원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인셉션>에서 공간을 왜곡시키는 비선형의 시퀀스를 그대로 옮겨와 현실적인 재난이 벌어지는 것처럼 활용됐다. <인터스텔라>에서 보여주었던 공간과 시간의 왜곡,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기인하는 천재성은 이 영화에서도 십분 발휘되어 경이로움마저 느끼게 했다. 드넓은 바다와 하늘을 휘감는 스크린의 광활한 모습은 우리를 더욱 작게 만들며 압도적인 스케일을 선보였다. 귀로 들리는 웅장한 소리는 심장 박동수를 증가시키며 아드레날린을 뿜어냈다.
놀란의 연출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호이트 반 호이테마의 촬영과 한스 짐머의 음악은 그러한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관객들은 그 현장에 놓여있는 듯 반응하게 된다. '총알이 빗발치지 않아도 전장에 있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구나'라며 눈과 귀로 체험할 수 있었던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캐릭터들의 수많은 대사와 수학적이고 과학적으로 깊게 고찰해야 할 것들을 포함해 어마어마한 CG 물량들이 대거 활용되었던 놀란의 전작들을 생각하면 이번엔 이를 최대한 감량하고 체험이라는 링 위에 관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올려두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저 멀리 폭탄이 투하되면 그 소리와 함께 파편처럼 튀는 모래를 뒤집어쓴다.
영화적 체험이 선사하는 스케일은 더할 나위 없이 풍부하여 긴장감을 극대화시키고 플롯이 이어가는 탈출과 생존으로 점철된 이야기는 관객들을 향한 총알이 되어 심장에 꽂힌다. 감독의 추천과 예상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 모두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덩케르크>가 전하는 울림, 감동으로 이어지다
이번 영화의 플롯은 위기에 몰린 연합군 40여만명의 탈출과 생존을 그린다.
이 플롯 위에 세 가지의 시선으로 판을 짠 것은 기존에 없던 그리고 결코 진부하지 않은 신개념이자 놀란의 또 다른 공식이 적용된 새로운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덩케르크 해변가에서 구출을 기다리는 병사들의 '일주일', 영국 땅에서 덩케르크로 구출작전에 나서는 민간인들의 '하루', 하늘에서 공중전을 펼치는 전투기 스핏 파이어의 '한 시간'을 그렸다.
핀 화이트헤드가 연기한 영국군 토미는 지나칠 정도로 말이 없다. 대사가 거의 없다는 게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러닝타임 대부분 행동으로 캐릭터를 읊는다. 토미 역시 고립된 연합군 40여만명 중 하나다. 그 역시 생존과 죽음의 공간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눈 앞에서 다른 동료 병사가 목숨을 잃고 덩케르크를 떠나 조국을 향해 가던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서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놀란 감독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절묘했다.
관객들은 토미로 등장한 핀 화이트헤드의 극 중 이름이 토미인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으니까. 토미라는 이름은 껍데기일 뿐 사실 그게 누구든 중요치 않다. 결과적으론 덩케르크 해변 지역의 일주일 동안 벌어진 연합군의 탈출과 생존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영국 땅에서 구출작전에 차출된 도슨(마크 라이런스)의 배가 피터(톰 글린 카니) 그리고 조지(베리 케오간)와 함께 덩케르크로 향한다. 총알과 폭탄이 빗발쳐 생명의 위협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장에 고립된 연합군을 구출하기 위해 성난 파도 위를 가른다. 바다 위의 하루를 그리는 동안 이들은 생존과 죽음을 동시에 마주한다. 누군가는 익사한 채 바다 위를 둥둥 뜨고 누군가는 살려고 미친 듯 헤엄을 치며 또 누군가는 좌초된 선박 위에 겨우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 하늘 위로는 적군과 아군의 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지나다니고 저 멀리 덩케르크에서는 검은 연기만이 피어오른다. 민간인이지만 이들은 전쟁의 중심에 있다. 노련하게 배를 움직이는 도슨은 마치 수도 없이 전쟁을 경험한 사람처럼 침착하고 태연하며 대담하다. 어린 피터나 조지는 그런 면에서 도슨과 극명하게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도슨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이들의 여린 마음과 전쟁에 대한 공포심은 마치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우리 세대의 모습이 투영되기도 한다.
바다 위 하루라는 시간의 가장 중점적인 포인트는 해변 지역의 일주일과 달리 공존의 의미가 더 크다. 도슨은 자칫하면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예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이미 사면초가이자 진퇴양난에 빠진 덩케르크 해변을 향해 그대로 직진한다. 덩케르크 지역에서 탈출을 시도하고 다시 바다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군인들에게 손을 내미는 시퀀스는 놀란이 말하는 공존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겠다.
하늘에서의 한 시간은 나머지 두 개의 시점과 달리 굉장히 긴박한 편이다. 전투기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가는 한 시간을 단 몇 분의 시퀀스로 압축하면서 위기감을 더했다. 이 시퀀스에 동원된 전투기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2차 대전 당시 쓰이던 스핏파이어(Spitfire)다. 3대가 하나의 조를 이뤄 비행하던 중 리더 전투기가 격추당하고 그나마 남아있던 콜린스(잭 로던)의 전투기 마저도 침몰한다. 결국 하늘 위에 홀로 남게 된 파리어(톰 하디)는 바닥을 보이고 있는 연료계를 보며 비행을 하고 적기를 발견해 공중전을 벌인다. 한 시간이라는 시간적 배치를 하늘 위 그것도 스핏파이어에 스피디한 미션을 부여한 만큼 매우 속도감 있게 연출되었고 마치 전투기에 올라탄듯한 리얼리티를 선보였다.
세 가지 시선과 서로 다른 시간대를 교차하여 연출한 놀란의 새로운 방식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더구나 이어지지 않을 듯 세 개의 분리점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한 작품에서 가장 흔히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두 개 이상의 장소와 시각으로 구성해 긴장감을 높인다는 것에 있다. <인셉션>은 같은 캐릭터들의 꿈속을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지는 듯 과감하게 연출해 이른바 '쪼는 맛'을 높였다. <인터스텔라>는 다른 공간과 시간대를 한 곳에서 터뜨리며 놀라운 반전을 선사했다. 이번 작품 역시 기존과 유사한 놀란만의 공식을 품고 있지만 기존의 틀을 깨부수고 자신만의 새로운 공식을 만들어 영화에 적용한 듯 느껴졌다.
상대방과 싸우는 흔한 모습의 전쟁신도 없거니와 배를 타고 전쟁터를 탈출하는 군인들의 단순한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생존이자 공존이고 생명의 가치라는 놀란의 메시지 또한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 위 작성 글에는 스포일러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의해주세요.
※ 상당히 인상 깊었던 영화였습니다.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리스트가 종종 올라오는데요. 이 영화 또한 그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을까 싶네요. 놀란 감독이 영국 출신인 만큼 영화 또한 영국인들에게 포커싱 되어 영국 미화라는 이야기들이 있었는데요. 처음엔 저 역시 비슷하게 느꼈답니다. 영국인들에 의한 영국인들의 탈출과 생존 그리고 갈채까지 이어지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인간의 근본적인 생존 본능과 상생이라는 의미의 공존 그리고 소중한 생명의 숭고함을 그려낸 것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더욱 많이 존재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