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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Oct 20. 2017

소녀의 투명한 눈빛과 성숙한 여인의 향기, 배우 문근영

#54 아름다우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신수원 감독의 신작, 영화 <유리정원>

배우 문근영은 1987년생으로 불과 12세 나이에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서>에 출연해 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를 쓰기 시작했다. 문근영의 이름을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킨 것은 KBS 드라마 <가을동화>(2000).

풋풋한 은서의 모습은 귀엽고 사랑스러울 정도였고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과 김래원과의 케미가 돋보였던 <어린 신부>(2004)에서도 여리고 당찬 모습을 선보인 바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학교에서 연극을 하면서 연기에 흥미를 느꼈다고 하는 문근영. 올해로 이립(而立)이라 불리는 서른 살이 되었지만 10대 마냥 아직도 어린 티가 난다.

그녀의 프로필 아래로 나열된 필모그래피를 보면 연기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쌓아 올린 배우로서의 노력 덕분에 신수원 감독의 신작 <유리정원>에서도 그 노련미가 돋보인다.  

소녀의 투명한 눈빛과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모두 가진 재연의 캐릭터를 통해 문근영의 필모그래피에는 한 줄이 더 추가되었고 스펙트럼은 보다 더 넓어졌다. 배우 문근영은 영화 속 재연으로서 완벽했다.  

영화 <유리정원>은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영화 <유리정원>  출처 : 준필름

※ 주의! 아래 작성글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됩니다. 반드시 유의해주세요!!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죠"

재연(문근영)은 인간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는 가설을 내세우며 연구에 몰두 중인 생물학도다. 다만,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생체실험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처럼 놓여있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신념 하나로 버티는 중이다. 그녀 옆에는 믿고 따를 수 있는 정교수(서태화)가 버팀목처럼 자리하고 있다. 정교수는 연구실의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책임지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재연을 시기하는 동료가 정교수와 더욱 가까워지게 되면서 재연은 연구실을 떠나 아무도 없는 숲 속으로 향한다.

생물학도 재연 역의 문근영.  출처 : 준필름

소설가 지훈(김태훈)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어렵게 계단을 오르는 재연을 바라본다.

신인작가로 데뷔는 했지만 벌써 몇 년째 이렇다 할 작품 없이 제자리걸음이다. 더구나 아내는 자신을 떠났고 살고 있던 집에서도 쫓겨나갈 형편에 마비증세까지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재연이 떠난 텅 빈 집에 지훈이 이사를 오게 된다.

"나는 나무에서 태어났다. 내 몸속에는 초록의 피가 흐르고 있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벽지가 떨어지면서 재연이 적어놓은 글귀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지훈은 재연의 자취를 밟아 세상과 단절하며 살아가는 유리정원 속의 재연과 마주한다.

재연이 살아온 외로운 삶과 정교수를 향한 재연의 동경을 소설로 쓰게 되면서 (작가로서) 죽어가던 지훈의 작품은 순식간에 인기 있는 소설로 거듭나게 된다.

재연과 정교수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과 충격적인 미제 사건의 진실들이 지훈의 소설로 여과 없이 올라오게 되면서 세상은 발칵 뒤집힌다.

정교수(서태화)를 바라보는 재연의 눈빛.  출처 : 준필름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죠"


이 한마디의 대사가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재연은 12살 때부터 한쪽 다리가 성장하지 않는 장애를 겪고 있다. 걸을 때마다 절룩거리기에 남들보다 늘 늦다. 그녀의 보폭을 맞춰준 사람은 다름 아닌 정교수. 정교수와 가까워지게 되면서 연구에 몰두하는 것 역시 보람차기만 하지만 프로젝트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게 되면서 정교수는 다른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수희(박지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선다.

유리정원 속에서 마주한 재연과 정교수.  출처 : 준필름

아내와 사별한 정교수는 부모 없이 홀로 남은 재연에게 '남자'이자 기댈 수 있는 '나무의 기둥'처럼 다가가 달콤한 키스를 나누게 되지만 현실과 부딪히며 수희의 손을 잡는다. 재연과는 풋내 나는 첫사랑의 느낌이라면 수희와는 격정적인 불륜 같은 느낌이 든다.  

장애로 인해 높은 하이힐을 신지 못하는 재연은 수희의 구두를 신으며 어린아이처럼 마당을 빙글빙글 돈다. 재연에게 맞지 않는 수희의 하이힐은, 순수함을 간직한 재연의 모습과 소유에 대한 욕망이 함께 담겨 있는 의미로 해석된다.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다고 수희를 향해 재연이 내뱉은 이 말은 오히려 재연 자신의 정체성을 향하고 있다.  

이처럼 프로젝트에 몰두하던 재연의 모습은 순수하기만 했다. 12살의 다리 한쪽과 성인이 되어버린 그녀의 육체는 어린 소녀의 감성과 투명함 그리고 강한 신념과 성공에 대한 갈망이 한꺼번에 공존한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한 생체실험은 기이했고 괴기했으며 앞만 보며 달려가는 경주마 같은 느낌이라 섬뜩하기까지 하다.

재연은 어린아이의 감정과 팜므파탈과 같은 여인의 날선 잔향을 모두 가졌다.

숲 속의 나무들이 햇살의 따스한 기운을 받아 초록빛을 뿜어내 싱그럽고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바람에 흔들리고 거센 빗방울에 요동칠 때면 욕망에 가득 찬 인간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듯 무섭다. 나무가 되겠다는 재연의 모습이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거대한 나무와 동일시된다.

재연의 자취를 찾아 유리정원에 들어온 지훈(김태훈).  출처 : 준필름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분열을 일으킨다. 말 그대로 욕망은 집착을 낳는다.

작가로서의 지훈에게 재연은 성공을 향한 욕망의 대상이었고 집착으로 이어지는 순간 그녀의 실체를 알게 된다.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반면 생물학도로서의 신념을 오롯이 간직한 재연에게 정교수의 배신은 욕망을 넘어 강한 집착을 갖게 했다. 프로젝트에 더욱 몰두하게 되면서 재연의 집착은 분열로 변하고 파멸로 이어진다.


문근영이라는 배우는 이번 작품을 통해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영화를 보면서 재연의 감정에 이입되어 눈물을 왈칵 쏟았다고 하니 그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무에서 태어나 다시 나무로 돌아가고자 하는 순수함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 자리하고 있다. 나무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있는 재연에게 나무는 엄마와 같은 존재다. 아프다고 울며 떼를 쓰는 아이를 감싸듯 나무는 재연을 감싸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재연이 기댈 수 있는 것 역시 나무의 존재다. 그래서 더 아프고 안타까웠을 것이다.

재연 캐릭터는 문근영에게 있어 맞춤옷과 같이 딱 맞아떨어진다. 


영화는 판타지적 요소를 부분마다 조금씩 담아냈다. 신수원 감독이 가진 독창성이 단순한 유니크(unique)함을 넘어 그로테스크(grotesque)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관객들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플롯으로 인해 진부함을 느끼는 순간 감독이 던지는 판타지들이 어색하기도 하고 다소 과한 부분도 존재한다. 상업영화로서의 흥행으로 이어지기엔 그 힘이 부족해 보이지만 아직까지도 소녀 같은 눈빛을 간직한 문근영과 초록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숲이 싱그러움을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나무 기둥에 기대어 잠든 재연.  출처 : 준필름

주의!! 이 글에는 스포일러 요소가 다수 포함됩니다. 유의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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