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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Mar 05. 2018

영롱한 청록빛으로 가득 찬 '사랑의 형태'

90회 아카데미 감독상 기예르모 델토로가 만든 아름다운 판타지

1950년대 말, 소련(현재 러시아)과 미국은 우주 진출에 대한 야망을 꿈꿨다. 소련은 떠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를 선택해 우주센터로 데리고 왔고 한 달 가까이 우주 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켰다.

1957년 소련은 스푸트니크(Sputnik) 1호라는 이름이 새겨진 인공위성을 세계 최초로 쏘아 올렸고 이후 동물도 우주에서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을 위해 유기견을 선택했다. 사실 애완견의 경우는 사람들과 집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야생이나 거리에서 떠도는 개들에 비해 환경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달간 고된 훈련을 견딘 유기견은 소련의 스푸트니크 2호에 몸을 실었다. 우주선은 발사대를 떠나 성공적으로 궤도에 올랐지만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라이카'라고 불리는 유기견은 그렇게 생체 실험에 동원되었고 지구 밖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라이카는 인간이 우주로 진출하는 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편 미국은 소련의 우주 진출을 목격한 후 더욱 박차를 가했다.


※ 주의!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될 수 있습니다. 유의해주세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
청록색 빛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판타지

1960년대 초, 소련과 미국의 우주 진출 경쟁은 계속되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은 항공우주센터 비밀 실험실에서 우주 개발과 진출을 위한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실험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수조에 갇혀 들어오게 된다. 실험실 여러 곳을 돌며 청소부로 일하던 일라이자(샐리 호킨스)가 우연히 괴생명체와 마주하게 되고 이후 일라이자의 삶이 조금씩 변화한다.

일라이자(샐리 호킨스)와 유리관에 갇힌 괴생명체.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

일라이자는 언어 장애가 있어 말을 하지 못한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외롭게 홀로 살고 있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활기차게 살아간다. 그녀가 있는 공간은 적막하나 그녀가 가진 에너지 덕분에 모든 오브제들이 늘 생기 넘치는 듯 느껴진다. 일라이자 옆집에는 온종일 그림만 그리는 자일스(리처타 젠킨스)가 살고 있다. 일라이자와 TV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친근한 이웃이다. 일라이자의 직장에는 일라이자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젤다(옥타비아 스펜서)가 있다. 일라이자가 수화로 말을 건네면 그 몇 배의 수다가 이어지기도 한다.

일라이자와 젤다(옥타비아 스펜서)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

한편 괴생명체를 실험대상으로 삼으려는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는 호프스테틀러 박사(마이클 스털버그)에게 해부를 강요한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 때문에 잔뜩 예민해져 있던 때다. 스트릭랜드의 캐릭터가 어쩌면 이를 대변하는 장치였을지도 모르겠다. 두 아이가 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지만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미소를 띠지 않는 무뚝뚝하고 괴팍한 사람이다.

반면 생체실험에 참여한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스트릭랜드와 달리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물불 가리지 않는 스트릭랜드가 말이 통하지 않는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이라면 호프스테틀러 박사는 기본적으로 '소통'을 할 줄 아는 감성적인 사람임을 직감할 수 있다.

리차드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와 호프스테틀러 박사(마이클 스털버그)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

수조에 갇혀있던 괴생명체는 비늘을 덮고 있고 사람의 형태를 갖췄으며 일라이자와 처음 소통을 하게 된다. 일라이자가 건넨 달걀을 집어, 부끄러운 듯 물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이나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일라이자와 교감하며 점차 마음을 열어가는 모습 속에서도 '불통(不通)'으로 굳게 닫힌 스트릭랜드와 대조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스트릭랜드는 괴생명체를 하루빨리 해부하고 연구해 우주 생체 실험에 더욱 채찍질을 가하고자 했으니 스트릭랜드와 괴생명체는 대립관계에 놓여있는 셈이다.

함께 음악을 듣는 괴생명체와 일라이자.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

스트릭랜드의 계획을 알게 된 일라이자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괴생명체를 탈출시키려 한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서 미자가 옥자를 탈출시키려던 장면들이 묘하게 닮은꼴을 이룬다.

그렇게 괴생명체는 일라이자의 집으로 안착했다. 몇 되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서 아주 절묘하게 뒤쫓는 사람들을 따돌렸다. 이들을 거침없이 쫓는 스트릭랜드, 괴생명체와 일라이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전작들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 역시 어둡고 축축한 배경이지만 오묘한 청록색 빛을 띤다. 괴생명체가 갇힌 수조나 물의 색깔 역시 청록빛이었고 일라이자가 실험실에서 청소부의 옷을 입고 있을 때 역시 청록색이었다. 자일스의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운 음식 역시 죄다 투명한 청록색, 아이러니하게도 스트릭랜드가 선택했던 캐딜락 역시 청록색이다.

감독이 연출한 미장센과 상상력에 아름다운 로맨스가 펼쳐져 동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번 작품은 '19금' 답게 잔혹하기도 하고 섹슈얼한 시퀀스도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영화가 설정한 영화의 타이틀과 실제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합일(合一)'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겪는 사랑이라는 존재는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형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타이틀처럼 물의 형태(the Shape of Water)는 사랑이 이루는 모양과 같이 단언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는 존재다.  

감독은 이번에도 평범한 로맨스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목소리 대신 눈빛과 손짓으로 이야기하는 일라이자와 지극히 이질적인 크리쳐(괴생명체)와의 만남은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중심에 서있다. '사랑에는 형태가 없고, 평범하진 않지만 본질과 진심이 담긴 사랑'이 바로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제90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에 빛나는 러브 스토리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헬보이>나 <퍼시픽 림>과 같이 육중하고 거센 SF도 존재하지만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나 <크림슨 피크> 같은 판타지 동화들이 더욱 기억에 남는 편이다. 그가 펼쳐놓은 스토리에는 영화적 상상력이 가득하기에 예측 불가한 플롯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더구나 감독이 창작한 크리쳐(Creatuer)들이 작품이 가진 동화적인 정체성과 같은 방향으로 연결된다.    

이번 영화를 통해 상상력으로 창조된 크리쳐는 감독이 그간 추구해왔던 캐릭터의 그로테스크함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캐릭터가 담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존과 확연히 다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일라이자를 연기한 샐리 호킨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어도 백 마디를 한 것처럼 느껴지고 그녀의 손짓과 눈빛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형태를 마치 손에 잡힐 듯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소련과 미국의 우주 진출 경쟁과 냉전시대에 가득했던 이야기들마저도 오롯이 엮어내 감독의 필모그래피 하나를 완벽하게 완성했다. 덕분에 그는 이 영화로 올해로 90번째를 맞이하는 아카데미 시상식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감독상과 작품상을 모두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이 밖에 미술상과 음악상 모두 <셰이프 오브 워터>가 차지해 4관왕이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이변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이 영화에 거는 기대감도 가득했고 예술성 또한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는다.

배우들을 바라보고 있는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

혹자들은 일라이자의 자위행위나 섹슈얼리티가 과하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더구나 일라이자와 괴생명체 사이에 '찰싹 달라붙을만한' 교감에 대한 이야기가 부재하다는 언급도 있었으며 굳이 소련과 미국이 경쟁하는 냉전시대의 배경이 필요했을까라는 목소리도 존재했다.

감독은 일라이자의 규칙적이고 평범한 생활 중 하나가 자위라고 언급하기도 했고 행위 자체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표현했다고 했다. 괴생명체와 사랑을 나누는 시퀀스 역시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따뜻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묘사했다고 덧붙였다. 누가 봐도 차가운 물 속이지만 일라이자의 자위행위를 차치하더라도 괴생명체와의 사랑은 얼마나 될지 모르는 물의 온도에 비해 지극히 영롱하고 따스했다.

사실 영화라는 것에는 굳이 없어도 되는 장면들이나 오브제가 설정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 있는 장면을 배제하고 나면 감독이 말할 수 있는 장치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표현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인데 감독의 상황 설명을 100% 이해하긴 어려울 수 있겠으나 일라이자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증명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물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그들.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

영화 <히든 피겨스> 역시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었던 1960년대가 배경이다.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정점에 있었던 인종에 대한 차별이 조금씩 완화되는 과정에 흑인들의 천재성이 제대로 빛을 발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이 영화 역시 인종은 물론,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젠더 의식을 스트릭랜드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갈등이 존재하고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트럼프 시대를 거울처럼 바라볼 수 있도록 1960년대 냉전시대를 배경에 깔았다고 말한다. 감독이 말한 것처럼, '현재의 본질은 과거로부터 기인'한다. 결과적으로 감독이 장치해둔 배경은 현실에 기반하고 농아와 크리쳐의 사랑은 차별이 가득한 현실에서 판타지를 그린다. 그러나 그것은 줄곧 우리를 괴롭혀왔던 차별, 우리 사회에 뿌리박은 선입견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감독의 희망도 함께 녹아있다.


※ 주의! 위 작성 글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될 수 있습니다. 유의해주세요.

90회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음악상 등 4관왕에 빛나는 <셰이프 오브 워터>   출처 : 20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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