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곳에서 '우리 가족이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바다를 좋아했다.
외할머니가 살고 계신 포항을 가족여행 삼아 1년에 딱 한 번씩 갔던 게 '여름휴가'의 전부였다. 몇시간이나 운전하셨을 아버지의 피곤함도 모른채 나와 내동생은 바다에 갈 생각에 마냥 신이 났다.
튜브에 몸을 맡겨 둥실둥실. 눈부시게 따가운 햇살과 조금은 차가운 바닷물에서 느껴지는 온도차가 아이러니한 기분을 안겨다 주곤 했다.
그 곳에 다녀오면 늘 그리웠다. 철썩이는 파도소리, 친인척들과 바다에서 조개를 잡으며 신나게 뛰어놀던 그때, 꼬깃꼬깃 두툼했던 용돈을 끄집어내 내 작은 손에 쥐어주셨던 외할머니의 손길. 모두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리곤 몇 년이 흘렀다.
같이 놀던 형 그리고 동생들은 모두 결혼을 해 이미 다른 곳에 살고 있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이 함께 했던 '포항의 기억'은 외할머니를 묻어드린 그 날이 마지막이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바다에는 카페와 주점들이 생겼고 기껏해야 왕복 2차선이었던 도로는 4차선에서 8차선까지 넓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나이가 들었고 외갓집 주변도 그렇게 변해갔다.
다른 건 다 변했어도 파도소리는 여전하구나.
어느덧 성인이 되어버린 나. 난 여전히 바다를 좋아한다. 파도소리만 들려오는 그 고요함과 장엄함에 넋을 놓게 된다. 저 멀리서 몰아쳐오는 파도가 내 발끝으로 휘몰아쳐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몇번씩이나 경험했던건데 난 여전히 그 파도와 '밀땅'을 한다. 내 모습은 변했는데 넌 여전히 그대로구나.
스트레스와 매너리즘에 빠져 갑갑하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버리고자, 무작정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 바다나 보러 가자!"
번개같이 여행 약속을 잡고 답답한 도심을 떠날 채비를 한다. 몸은 아직이지만 마음은 이미 저 바다 그리고 저 해변가.
"엄마, 저 다녀올게요"
일도 다 내팽개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바다를 향해.
저 멀리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신나게 뛰어놀고.
먼 곳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좋은 곳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도.
난 기억하고 있었을까? 우리 가족이 함께 했던 여행이 언제였는지.
사춘기를 지나오면서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 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있을때 잘해!"
수십번도 들었던 말.
"그래, 잘해야지!"
'다짐'은 한순간이었고, '행동'은 한동안 고요했다. 그리곤 그렇게 몇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약속을 했다. 꼭 약속을 해야만 이루어지는건 아니었지만, 함께 떠나기로.
비로소 가족과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제주로 떠났다. 몇 년 만인지. 생각해보면 늘 친구들과 비행기를 탔던 것 같다. 우리 네 식구가 함께 비행기를 타본 적이 있기나 했던가? 무심함에 죄송하고 무뚝뚝함에 반성하는 순간.
성산일출봉을 오르기 전, 언덕 위에 올랐다. 그 짧은 몇 분간 우리 가족은 조용히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귓가에 울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온 몸이 정화되는 이 기분. 너무 좋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아.
몇 번이나 해왔던 '흔한' 여행일 뿐인데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이리도 좋은 것을 왜 몰랐을까? 도심에서 느꼈던 답답함과 하루하루 치이며 살아왔던 우리에게 제주는 진정한 '힐링 포인트'였다.
제주의 이 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맛깔난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4일.
아쉬움이 크다고 느낄 만큼 4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너무 짧았다.
장난을 치며 뛰어노는 친구들, 귓속말을 하며 무언가 속삭이는 연인들, 그리고 우리처럼 가족들과 함께 하고 있는 관광객들. 그들 역시 이 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유모차에서 울고 있는 저 아이도 언젠가 부모의 키만큼 자라 반항도 해보고 그에 따른 반성도 하게 될 것이며 지나간 시간들을 반추하며 다시 가족과 함께 하게 되겠지. 그렇게 세월은 또 흐르게 되겠지만 이 곳은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것이다. 지금 여기에 와있는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아쉬움 가득한 여행일정, 그나마 궃지 않았던 날씨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만큼 제주는 우리 가족을 제대로 반겨주었다. '꼭 한번 함께 여행해야지'라는 다짐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그렇게나 오래 걸렸는데, 또 다른 어딘가로 '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한다.
최근에는 한 달에 한 번이나 볼까 말까 한 가족들, 각자의 삶에 또다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쌓여가는 스트레스를 그나마 조카의 웃음소리가 해결해주고 있다. 차 한 대로 충분했던 네 식구였지만 이젠 차 2대도 모자랄 만큼 구성원이 늘었다. 다시 한번,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