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에세이 #벳푸 편
유유자적(悠悠自適).
여유가 있어 한가롭고 걱정이 없는 모양을 일컫는다.
벳푸에 다녀온 느낌이 그랬다. 유유자적을 마음껏 만끽하고픈 흔한 시골 풍경의 느낌.
도쿄에 다녀온지 5년 만에 다시 일본 땅을 밟게 됐다.
이번에는 후쿠오카 벳푸로 떠난다.
사실 후쿠오카, 벳푸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후쿠오카라면 그저 소프트뱅크 호크스라는 야구팀이 존재하고 여기에 한화 이글스 출신의 이범호가 거쳐갔다는 사실뿐. 물론 지금은 기아 타이거스의 내야수로 활약 중이다.
지난번 도쿄 여행보다 준비할 건 많지 않았다. 가이드가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여행과 출장이라는 타이틀이 한꺼번에 접목되는 바람에 일종의 단체 패키지가 되었고 현지 정보와 환경, 일본어가 유창한 가이드는 필수였다.
늘 가이드 없이 자유여행을 해왔던 터라 가이드의 존재 여부와 거기서 느끼는 차이는 큰 편이었다.
확실히 기댈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홀가분하기도 했다.
친구 한 녀석이 국내에서 취업문을 두드리던 도중 필리핀으로 돌연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다.
이 친구는 몇 개월 뒤 필리핀의 어느 한 여행사에서 TC(Tour Conductor) 즉 여행 안내원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현지인들과의 의사소통은 물론이고 그 지역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을 해야 하는 직종으로 휴양지의 볼거리를 안내해주는 역할과 이것저것 많은 설명과 해설이 필요한 도심 속에서의 안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난 벳푸에서 숨도 참아가며 줄줄이 이야기하는 가이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수많은 정보와 왜곡된 사실들을 정확히 짚어가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전형적인' 가이드 이상인 듯했다.
"가이드는 원래 다 그런 거야"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꽤 많은 도움이 된 건 분명하다.
출발 당일.
차를 직접 몰고 칠흑 같은 어둠을 달리고 또 달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공항은 조용했다.
올 때마다 늘 북적이던 곳이라 이렇게 조용한 느낌은 뭔가 어색하기까지 했다.
하나 둘 도착하는 일행들. 해가 뜨고 게이트에 들어갈 시간이 되자 점차 북적이기 시작했다.
대략 9시에 다다를 때쯤 비행기가 하늘로 솟았다. 언제나처럼 기분이 묘해진다.
1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비행시간.
아주 간단한 샌드위치 하나가 런던으로 초대한다는 글귀가 쓰인 박스에 담겨 제공되었다.
마치 이 박스를 열면, 날계란 몇 알이 들어있을 듯한 익숙한 모양새다.
따뜻한 밥과 반찬, 디저트가 쫙 차려져 있던 일반 기내식과는 차이를 보였다.
비행시간이나 비행거리를 감안한 기내식인 모양이다.
소화가 다 되기도 전에 도착 알림이 방송을 통해 전해졌다.
비행시간은 제주도로 가는 시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후쿠오카는 지도로만 보아도 대한민국 땅과 매우 근접해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거제도를 지나 동남쪽으로 쓰시마섬만 넘어가면 바로 후쿠오카다.
일본에는 온천지대가 유난히 많은 편인데 후쿠오카 벳푸는 그중에서도 손에 꼽는 온천마을이다.
도시 이 곳 저 곳에서 수증기가 올라와 마치 시골마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듯한 느낌이랄까?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누군가 대형 주전자에 물을 붓고 매일 같이 끓여대는 현상이랄까? 지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서 보니 험상궂게 생긴 사무라이 모습의 동상 하나가 관광객을 맞이했다.
액운을 멀리멀리 하고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는 의미라 들었다.
아마도 이 곳의 상징물 같은 존재인 모양이다.
후쿠오카 공항의 사무라이 동상은 진정한 인증샷의 배경이 되고 있는듯하다.
버스를 올라타 호텔로 이동하던 중 주변의 많은 건물들과 공장들이 보였고 흔한 항구도시 느낌을 뿜어냈다.
뭐랄까, 정확하진 않지만 부산이라 하기엔 작고 통영이라 하기엔 크다는 느낌.
반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야구 경기장은 꽤 웅장한 모습이었다.
후쿠오카 야후 오크돔
이 돔 경기장은 개폐식으로 1993년에 캐나다 로저스센터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야후가 명명권을 가지게 되면서 후쿠오카 야후 돔이 되었고 2003년 후쿠오카 야후 오크돔을 변경되었다고 한다.
고척 스카이돔이 개장 당시 2만 2천 명 수용이라 했으니 이 곳의 3만 5천 명 수용 가능 인원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크기다.
우리가 숙소로 잡은 곳은, 야외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스기노이 호텔이었다.
룸은 한 귀퉁이에 침대로, 넓은 거실에 쇼파 하나 있는 일반적인 형태 대신 다다미 인테리어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1층 로비 옆으로는 티 라운지인 '아제리아'가 있고 일본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하나미즈키'가 자리하고 있다.
마치 '오야붕(おやぶん)' 이라도 외쳐야 될 것 같은 분위기.
일본 가정식인 가이세키 정식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으나 깔끔하고 다양한 식사가 제공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저 음식들을 사진으로만 보고 있으니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인다.
얇게 쳐진 복어 회는 그야말로 압권!
그 밖에 이어져나오는 음식들도 매우 깔끔하고 다채로웠다.
1층에는 일본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는지 꽤 북적거렸다.
아이들은 호텔에 마련된 온천으로 이동하는 듯했다.
우리 일행들 중 몇 명은 이어진 술자리보다 온천을 선택해 나름의 여유를 즐겼다.
벳푸에서 즐겨야 할 것은 먹거리뿐 아니라 온천과 유후인이다.
스기노이 호텔 내에서 즐기는 야외 온천은 실내는 그냥 평범한 대중목욕탕 같지만 야외로 나가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미끈거리고 감촉 좋은 온천물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여기뿐이겠는가?
벳푸의 지옥온천은 반드시 가봐야 할 곳 중 하나일 것이다.
벳푸, 지옥온천
벳푸의 지옥온천은 꽤 독특한 명칭과 다양한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온천수는 시음도 가능하고 어느 곳은 족욕만 가능하며 또 어떤 곳은 눈으로만 보는 곳이 존재한다.
독특한 명칭이란,
바다지옥, 스님머리지옥, 가마솥 지옥, 도깨비산지옥 등을 말하며 그곳의 특징과 외형, 기능 등을 참고해서 명명된 듯하다.
약 8곳의 테마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8곳 모두 가보려면 2,100엔의 입장권으로 즐겨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린 이 곳에서 신기한 모습들을 눈으로 목격했다.
어떤 곳은 옅게 뿜어져 나오는 분출구에 담배연기를 내뿜으면 수증기가 더욱 많이 내뿜어지는데 구름이 생기는 현상과 유사하다고 한다.
마침 잘 됐다 싶었는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담배에 불을 붙인다.
에메랄드빛의 온천수가 있는 반면, 붉게 물든 진흙 색의 온천수가 펄펄 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말 지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피연못 지옥이라는 곳은 말 그대로 핏빛. 모락모락 수증기가 올라오는 피연못 온천수는 78도라고 한다.
온천 마을 답게, 이 곳에서 솟아나오는 온천수의 양이 무려 13만 킬로리터(kl) 이상이라고 한다.
도깨비산 지옥온천이라 불리는 입구로 오니 더욱 '지옥' 같은 느낌이었다.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확실히 허기가 진다.
이 곳에서는 온천수로 푹 쪄낸 계란을 먹을 수 있는데 딱히 다른 맛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선사하는 맛 자체가 남다르다.
삶은 달걀과 함께 마시는 소다맛 사이다인 라무네는 굉장히 조화로웠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산가리아 라무네'를 몇 병을 주문하고는 그때를 떠올리며 마시기도 했다.
사실 용량도 적고 맛도 아이들이 좋아할법한 '소다맛' 아이스크림 맛인데, 이 작은 사이다가 주는 청량감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아주 따뜻한 온천수에 발을 담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다. 물은 따뜻하고 사이다는 시원하니 지옥이 아니라 낙원이로구나.
온천의 이 곳 저 곳을 둘러본 후 출구 방향으로 나가다 보면 온천수와 관련한 그리고 벳푸에서만 볼 수 있는 기념품샵이 존재한다.
역시나 관광지인만큼 기념품샵은 필수로 존재하는 듯했다.
여러 가지 건강용품도 있는데 그중에 눈에 띄는, 다소 민망한 타월도 존재했다. 이를테면 19금 타월?
벳푸의 온천과 더불어 꼭 가볼만한 곳 중 하나가, 유후인의 거리다.
일본의 대표적인 온천 마을로서 유후인역에서 긴린코까지의 거리인 유노쓰보가이도(湯の坪街道)를 걷다 보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
길거리에 앉아있는 고양이마저도 그 고즈넉함과 고요함에 꾸벅꾸벅 졸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걸려있는 작은 미술관, 머리가 천장에 닿을듯한 잡화점, 갓 튀겨낸 고로케를 파는 음식점까지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와 굳이 비교한다면, 인사동이나 삼청동 거리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 곳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의 포인트는 호수다.
유후인의 긴린코 호수는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게 어떤 애니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굉장히 익숙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유후인 거리를 계속 거닐다 보면 서서히 허기가 진다.
유후인의 금상고로케가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갓 튀겨낸 고로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안에 품고 있던 재료들의 향이 뿜어져 나오는데 혀에서 느끼는 미각과 코로 느껴지는 후각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사람들이 모여 북적인다 해도 그 틈에서 아주 묘하게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유후인, 이 곳이 가진 특유의 매력이 아닐까?
새소리도 물소리도 '힐링' 하기에 충분하다.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눈을 감고 유유자적하며 한가롭게 즐겼으면 했다.
우리는 이 곳을 떠나 벳푸 로프웨이로 향했다.
로프웨이에서는 대형 케이블카를 탈 수 있는데 이걸 타고 쓰루미 다케 산 정상으로 이동하게 된다.
쓰루미 산은 해발 1,375미터.
케이블카로 이동하면 지상에서 산 정상까지 약 10분 이상이 소요된다.
이 곳, 쓰루미 산은 온천도시로 만들어 준 원천지로 지금도 화산활동 중이라고 했다.
사계절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벳푸시의 전경을 눈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날씨가 좋은 날이라면 저 멀리도 한 눈에 들어올 듯했다.
더불어 주변 산책길에서는 '칠복신(七福神)'을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건강, 학문, 장사, 행복, 행운, 온화, 장수 등으로 이 역시 재미있는 테마인 듯했다.
몇 번이나 타봤다고 했지만, 탈 때마다 밖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고소공포증'의 가이드가 벌벌 떨 정도로 케이블카는 아주 높은 곳에서 움직였다.
가이드라는 직업으로 인해 10분간의 고소공포증도 이겨내야 하는 책임감! 글쎄, 과연 내가 반대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우린 저녁을 위해 다시 호텔 부근으로 이동했다.
과거 YS 정부 때 YS가 한일정상회담을 마치고 방문했다는 고급스러운 일식당이었다.
'모미야'
당시 YS와 하시모토 총리가 만찬을 가진 별장 명소인데, 제철 재료로 품격 있는 요리를 선보여 꽤 유명하다고 한다.
가격은 알 수 없지만, 꽤 비쌀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우리가 가진 예산이 이렇게 많았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
호텔 1층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들보다 퀄리티가 높다고 느끼긴 했지만, 아쉬움은 있었다.
아무래도 유명한 곳이라는 말에 기대감이 컸던 모양이다.
여행의 끝자락은 늘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에는 잘 먹고 잘 놀고 잘 구경했음에도 뒤돌아서 사진을 보다 보면 늘 아쉽다.
사진이 왜 이것뿐이지? 내가 보고 느낀 건 무엇이지? 잘 놀다 온 게 맞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여행은 내가 경험하고 있는 지금 일상과는 '다른, 세상'의 경험이고 그게 쌓이면 축적이 되어 무형의 재산이 되는 게 분명한데, 여기에 의미부여를 하다 보면 끝이 없을 듯하다.
'이번엔 제대로 쉬고 와야지'라고 해도 늘 피곤하고 또다시 가고 싶은 게 바로 여행인 듯하다.
또 그게 매력이 아니겠는가?
벳푸에서의 여행은 생각보다 짧았다. 하지만 그곳이 가진 온천이나 유후인의 고즈넉한 매력은 아직까지 잊을 수 없는 포인트다.
다소 비싼 곳에서 즐긴 여행인지라 다시 경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다시 가고픈 곳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 스기노이 호텔은 이 곳에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합니다. 여러군데 온천이 존재하지만 여기서도 맛깔나게 즐기실 수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