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11년을 함께 했던 블랙위도우, 이젠 안녕!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해피와 함께 링 위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그 뒤로 페퍼 포츠(기네스 펠트로)가 누군가를 소개한다. 토니 눈을 사로잡은 그녀의 이름은 바로 나타샤. 2010년 블랙위도우(나타샤의 극 중 캐릭터이며 스칼렛 요한슨이 연기했다)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에 첫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해피 호건 역의 존 파브로 감독(이자 배우)은 185cm이고 나타샤 역의 스칼렛은 160cm이다. 블랙위도우의 날렵한 운동 신경과 뛰어난 무술 실력은 겉으로 드러나는 체급 차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물론 후반 시퀀스에서도 여러 명을 단숨에 제압하는 놀라운 액션이 펼쳐지기도 했다. 거기에 아름다운 착지 포즈는 덤!
검은색 코스튬을 입은 나타샤의 모습을 보고 범상치 않은 캐릭터라 여겼다. 이를 본 관객들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2010년 개봉한 <아이언맨 2> 이후 <블랙위도우>가 개봉한 2021년까지 무려 11년간 MCU 세계관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블랙 위도우라는 이름을 관객들 머릿속에 깊게 아로새겼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서 이야기의 묶음을 구성하는 페이즈(Phase)도 벌써 4번째가 되었다. 지난 페이즈 3가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으로 마무리되었는데 페이즈 4의 시작이자 첫 스타트가 <블랙 위도우>이다. 아쉽지만 페이즈 4의 포문을 연 블랙위도우에게는 정작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페이즈 4의 시작과 블랙위도우의 마침표가 동시에 공존하는 <블랙위도우>는 자신의 첫 번째 단독 영화이고 MCU 세계관에서 여성 캐릭터로는 <캡틴 마블> 이후 두 번째이다. 3번이나 개봉이 밀리긴 했다만 아름답게 안착했다. 나타샤와 함께 시스터 후드(sisterhood)를 제대로 그린 옐레나 역의 플로렌스 퓨는 작품에 걸맞은, 더불어 나타샤와 자매로서 케미스트리가 돋보이는 맞춤 캐스팅이었다.
※ 아래 내용에는 스포가 있습니다.
나타샤의 어린 시절은 평범해 보였다. 동생이 있고 이를 반기는 엄마가 있으며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아빠가 있다. 그렇게 4명이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있지만 이는 미션 수행을 위한 껍데기였을 뿐이다. 경비행기를 타고 쿠바로 탈출하게 되는 나타샤 가족은 눈앞에서 생이별을 하게 된다. 나타샤와 옐레나는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가 이끄는 레드룸(Red Room)에서 위도우(Widow)로 거듭나게 된다. 레드룸이란 어떤 곳인가? 특수 병기로 훈련받은 위도우들로 하여금 세상을 휘어잡으려는 드레이코프의 요새 같은 곳이다. 드레이코프가 조종하는 위도우들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훈련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위도우들을 한곳에서 바라보며 <1984>의 '빅브라더'처럼 존재하고 또 군림했다.
"고통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
나타샤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성장했고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경험들을 통해 인간 병기가 되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어벤져스에 합류하긴 했지만 이래저래 쫓기는 상태가 되어버린 나타샤는 동생 옐레나를 찾게 된다. 오래간만에 만난 언니와 동생은 아주 거친 우애를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바로 이때부터 옐레나의 본격적인 매력이 드러나게 된다. 입담도 입담이지만 나타샤 못지않은 액션 연기를 뽐내면서 놀라운 흡인력을 발산한다.
한편 반가움 대신 거리감과 어색함을 보였던 가족들과의 조우는 이 영화의 정체성이 스파이 액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주며 오히려 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표면상이지만 아빠 역할을 했던 슈퍼 솔저이자 레드 가디언 알렉세이(데이빗 하버)는 시종일관 '특급 조연'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TV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의 진지하고 묵직한 호퍼는 온데간데없이 재치 있는 모습을 보인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천재 과학자 멜리나(레이첼 와이즈) 역시 엄마라는 이름의 구성원이 아니라 하나의 특수 요원처럼 온전히 임무에 충실한다. 어쨌든 이들 4명이 가족으로 다시 뭉쳤다. 공중 요새 레드룸 그리고 드레이코프의 만행을 깨부수기 위한 단합이다.
(혹자는) 상대방의 행동을 파악하고 무기 정보를 스캔해 그대로 대응하는 태스크마스터를 이 작품의 빌런이라 언급하며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중도 적고 볼품없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실질적인 빌런은 바로 드레이코프. 위도우들의 여성성마저 그대로 제거해버리는 것은 잔혹한 박탈이고 절대복종을 위한 권력의 잔악한 행위나 다름없다. 더구나 자신을 해할 수 없도록 페로몬을 매개체로 방어하는 것 역시 절대 군림을 위한 장치라는 걸 오롯이 증명한다. 또한 자신의 딸마저도 야망의 쟁취와 방어를 위한 또 하나의 도구로 쓰이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혹독하게 훈련받아 인간병기가 된 위도우들은 드레이코프를 향한 복수는커녕 조금의 저항 조차도 하지 못한다. 그 억압의 본질을 인지하며 맞서 싸우는 것 역시 나타샤와 옐레나다. 드레이코프를 처단하는 순간 무의식에 갇혀 세뇌당한 수많은 위도우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니 이는 블랙위도우를 통한 구원이리라.
그래서인지 러닝타임 내내 답답하게 갇힌 위도우들에 대한 통렬한 복수가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구름 사이를 뚫고 땅바닥을 향해 내려앉는 레드룸의 산산조각 엔딩은 거창했던 야망의 파국이다.
드레이코프의 복수를 끝으로 위도우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정체성과 잃어버렸던 영혼을 되찾게 된다. 나타샤의 마지막은 영화에서 보여준 시간대 흐름에 따라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로 향해가지만 그 뒷모습은 2021년을 사는 우리 그리고 MCU 세계관의 영원한 이별이 되어버렸다.
희생과 구원을 끝으로 대미를 장식한 <블랙위도우>, 이젠 안녕!
※ 나타샤의 아역으로 등장했던 에버 앤더슨을 보고 밀라 요보비치와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했다. 푸른색 눈빛과 머리 색이 절묘할 정도로 인상 깊었는데 실제로 밀라 요보비치의 딸이다. 밀라 요보비치는 우크라이나 출신이고 에버의 아버지는 영화 <레지던트 이블>의 메가폰을 잡았던 영국인 감독 폴 앤더슨이다.
※ 드레이코프의 딸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배우 올가 쿠릴렌코가 연기했다. 여러 작품에 등장했지만 <007 퀀텀 오브 솔러스>의 히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 시원한 액션을 더해주기 위한 (제대로 된) 빌런과의 격투가 없어 다소 아쉬울 순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에는 개인적 의견이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 역시 개인의 차이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