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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Dec 17. 2021

어른의 맛을 즐기다, 평양냉면

나이가 들면서 평양냉면의 진한 참맛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게 늘 어른이었다. 언제나 나보다 컸고 늘 나보다 강했으며 줄곧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었다. 가끔 무뚝뚝한 아버지의 모습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무렵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손에 무엇인가 들려있을 땐 그게 무엇이든 마치 우리의 것처럼 느껴져 반갑게 달려가기도 했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면서 목소리에는 변성기가 찾아왔고 2차 성징과 함께 사춘기가 자리했음에도 아버지의 외적 그리고 내적인 어른의 모습을 상대할 순 없었다. 그냥 그런 존재였다.

목욕탕에 같이 가도 뜨거운 물속에서 '시원하다'라는 그 외침을 이해할 수 없었고 목욕 후 바나나우유의 달콤함으로 갈증을 달랬던 나와 동생은 아버지 손에 들린 커피의 쓴 맛을 공감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의정부에 살았다. 소시지와 햄이 가득 들어간 부대찌개는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음식 중 하나였다. 질릴 법도 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오늘 외식하자. 뭐 먹을까?"


외식이라는 단어 하나가 주는 기쁨은 남달랐다. 먹을 것에 있어서는 우리의 취향과 선택을 존중해주셨기 때문이고 자장면, 소고기, 돈까스 등 먹고 싶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만큼 해 저문 저녁 공부 대신 밖으로 나가는 것을 내심 즐겼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여름 끝자락, 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나도 물론 냉면을 좋아했다. 찜기 위에 얌전하게 놓인 만두 한 접시도 순식간에 먹어치우던 시절이었다. 냉면과 만두의 조합은 늘 한결같았다.

우리 가족이 찾아갔던 냉면집의 이름은 평양면옥이었다. 주말이어서 그랬는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당연히 맛있는 음식점이라 생각했다. 늘 그랬으니까 말이다. 난 동생과 바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오랜 시간 기다렸더랬다. 대기표에 적힌 순번을 크게 외치는 가게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로 가득 찬 식당은 시끄럽게 북적였다.  


"여기 냉면 4그릇 하고 만두 하나요"


사람들이 후루룩 거리며 먹는 냉면의 맛은 상상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냉면이라 하면 죄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평양냉면의 첫 경험은 바로 이날이었고 그날 맛본 냉면의 맛을 알기 전 내가 경험했던 냉면은 죄다 고기를 먹고 후식으로 먹는 이른바 '단짠단짠(달콤 짭짜름한)' 함흥식 냉면이나 칡냉면뿐이었다.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냉면이 만두와 함께 서빙되었다. 눈앞에 올라온 냉면에는 고기 몇 점과 계란 반쪽 그리고 고춧가루가 뿌려진 굉장히 일반적인 냉면의 모습 같았다.

그리곤 젓가락으로 듬뿍 집어 입으로 넣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육수를 마셔봤는데도 차갑다는 느낌뿐이었다. 식초에 겨자까지 적절하게 섞어보려 했다.


"이건 그냥 먹는거야"
"아무 맛도 안 나는데요?"

"평양냉면이 원래 그런거야"


평양냉면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북한에서는 냉면을 이렇게 먹는다는 말인가? 의아했다. 함흥냉면에 익숙한 내게 평양냉면은 그저 '무(無) 색'이었다. 만두를 먹고 나니 씹히는 고기의 맛이 그나마 혀를 자극하는 듯했다.


"평양냉면은 심심한 맛으로 먹는 거야"


이건 마치 뜨거운 열탕에 들어갔을 때 '시원하다'라고 표현하는 아버지의 느낌이 아니었을까? 뜨겁지만 시원하다고 말하고 아무 맛도 나지 않지만 맛있다고 하는 것처럼.

나이가 들어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모습과 달리 외형적으로도 내가 훨씬 크다. 나도 그렇게 어른이 되어 뜨거운 탕의 시원함과 커피의 쓴맛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말이다.

당연하지만 점점 입맛도 변해갔다.

어느 날, 회사 부장이 "오늘 회식은 을지면옥"이라며 장소와 시간을 지정했다. 을지면옥의 대표 메뉴는 평양냉면. 돌도 씹어먹을 나이에 싫어하는 음식도 나름대로 맛깔스럽게 먹을 줄 아는 사회인이자 어른이 되고 난 후의 평양냉면은 내게 어떤 맛을 전해줄 것인가 궁금했다. 그렇게 그날 저녁 을지면옥을 찾게 됐다. 냉면에 사리를 추가하고 수육 몇 접시를 시켜 넓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 뒤로 초록색 병에 가득 담긴 화학물질을 함께 마셔댔다. 수육을 먹고 냉면을 먹는데 무엇인가 번뜩이는 맛이 스쳤다. 그저 무(無)라고 생각했던 이 냉면에서 깊고 진한 향이 온몸을 자극했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음에도 '맛'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때, 맛있지?"

"네? 네, 맛있는데요?"


그날 내가 느낀 평양냉면의 맛은 내가 어렸을 적 느꼈던 그 맛과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그날 이후로 평양냉면에 대한 경험을 쌓아 올리며 절제된 그 기본의 맛에 충실하게 되었다. 바로 평양냉면이 주는 '슴슴한 맛'이다. 언제 먹어도 심심하지만 어느 지방의 사투리처럼 '슴슴함'이라는 말에서 기인하는 평양냉면의 온전한 깊은 맛이 내가 나이 들어간 만큼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가끔 친구들과 만날 때도 강남 평양면옥을 약속 장소로 정하기도 했다. 나와 몇몇 친구들은 평양냉면에 꽂힐 정도였지만 또 다른 친구는 아직까지 비빔냉면의 양념만 먹는 중이다. 식초를 뿌리고 겨자를 섞어 자신의 비법인 것처럼 맛을 뽑아낸다. 냉면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무아지경에 빠진 우리에게 한마디 던진다.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거냐?"

"평양냉면 맛!"


사실 어린 시절의 그 평양냉면과 지금 눈앞에 가득 담긴 평양냉면의 맛은 다르지 않다. 냉면의 맛은 몇 년이 지났어도 변함없이 한결 같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 냉면을 팔고 있는 의정부의 평양면옥도, 을지로의 을지면옥이나 을밀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 변한 건 온전히 나 자신이다. 내 몸집은 크게 성장했고 내 입맛도 서서히 변화를 겪어냈으며 내 나이도 세월이 쌓인만큼 그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하루는 청계천을 열심히 운동삼아 걷다가 문득 냉면이 생각나 그곳을 찾았다. 홀로 자리를 차지한 채 조용히 냉면으로 한 끼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나도 빈자리에 앉았다.  


"여기 냉면 하나 주세요"


photograph by pen잡은루이스

* 전에 끄적이던 글 하나를 조금 수정해서 올려봅니다. 과거를 추억하고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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