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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Dec 03. 2021

평범한 직장인의 양푼 '하루' 비빔밥

그날 하루를 양푼에 넣어 고추장과 함께 비벼먹었다. 맛깔스럽게!


오전 7시 30분. 어김없이 알람이 울린다. 휴대폰을 대충 집어 들고 아주 익숙하게 알람부터 꺼버린다. 어떻게 잠을 잤는지 온 몸이 쑤신다. 까치집에 푸석한 얼굴, 반도 뜨지 못한 눈으로 오늘도 어제처럼 창문을 살짝 열어본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며 얼른 잠에서 깨란 듯 시끄럽게 유리창을 두드린다.


"그래, 일어났다”


새벽 내내 조용히 찾아온 부슬비가 아스팔트를 흠뻑 적시고 있다. 금방 그칠 비는 아니었다. 출근 준비를 하고 기다란 검정 장우산을 꺼내 회사로 향한다. 가볍게 내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운동화 끝을 적시며 안으로 스며든 빗물이 뽀송뽀송 했던 양말도 머금는다.

빗소리에 따스한 커피 한잔 생각나는 운치 있는 날을 기대했건만 아침부터 찝찝한 기분이 한가득이다. 자리에 앉지도 못했는데 팀장이 부른다. 잔뜩 살기 있는 목소리로 미처 완성되지 못한 서류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한다. 그런 와중에도 축축해진 양말이 신경 쓰인다.


‘편의점 가서 양말부터 사야겠다’


“야, 듣고 있어?!!”

"네? 네, 알겠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가시 돋친 잔소리가 한글 파일에 범벅이 되어 페이지에 가득한 검은색 글씨를 붉게 물들인다. 몇 장 되지 않는 파일 이건만 수정하라고 지시한 붉은 영역들을 보니 눈이 아프다.

오전 내내 파일 하나를 정리하니 시간이 훌쩍 흘러간다. 종일 짜증만 냈던 하늘도 기분이 풀렸는지 빗소리도 잦아들고 있다.


"밥 먹으러 가자. 우리 팀장 나갔어"


12시도 되지 않았는데 옆부서 동기가 찾아와 밥을 먹자고 보챈다.

본래 정해진 점심시간도 팀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질 순 있다.


"먼저 올라가. 잠깐 편의점 좀"


오후 12시. 구내식당으로 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양말부터 집었다. 발에 맞지 않는 듯한 양말이긴 해도 아침에 느꼈던 그 부드러운 보송함이 발 전체를 감싸 편안함을 준다.

비가 오는 날이라 그랬는지 구내식당도 평소와 달리 북적거린다. 따끈한 차조밥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우거지 된장국 그리고 아몬드멸치볶음과 햄 몇조각 그리고 콩나물무침이 눈에 보였다. 먹음직스럽다는 표현 자체는 그저 사치일 뿐 살기 위해 먹는다는 느낌으로 가득했다.


"고추장 없나. 시간도 없는데 대충 비벼먹고 싶네"


있지도 않은 고추장 없냐며 괜한 투정 한번 부려본다. 그것도 사람 많은 구내식당에서 말이다. 반찬은 그냥 먹는 둥 마는 둥, 상사를 향한 불만에 세상 사는 이야기를 잔뜩 비비고 뒤섞어 증거인멸이라도 하듯 목구멍 안으로 쑤셔 넣는다. 10분이나 지났을까? 빠르게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니 커피 한잔의 여유가 생겼다.


"벤티 사이즈에 샷 추가해주세요"


점심 한 끼 가격보다 비싸고 밥그릇보다 더 큰 사이즈의 커피를 들고 또다시 사무실로 기어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본다. 아침부터 온몸에 자리했던 근육통이 사라져 버리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후 내내 존재하던 업무들이 컵 안에 잔뜩 담긴 카페인마저 괴물처럼 집어삼킨다. 모니터 앞에 놓인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이 온다.


'바쁘지? 집에 반찬 떨어질 때 된 거 같은데. 연락해라'


혼자 사는 자식 생각에 길지 않은 한 문장임에도 걱정 가득한 문자가 화면을 밝게 밝히더니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 휴대폰은 다시 잠을 잔다. 나의 시선은 다시 글자 가득한 모니터로 향한다. 모니터에 걸어둔 화면 보호기에 붉게 노을이 비춘다. 저녁 무렵 겨우 마무리된 서류를 들고 다시 검토를 받았다.


"폰트 사이즈랑 줄 간격. 이거 안 맞잖아. 내용도 중요하지만 보기 좋게 해야지. 보고할 때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오후 5시. 그렇게 비수를 꽂더니 화창해진 날씨처럼 팀장의 목소리도 아주 살짝 개인 듯했다. 퇴근시간이라 그랬던 것일까? 붉게 물든 노을빛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다.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마무리한다.

알고 보면 내용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오전 내내 팀장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충실한 내용'이었으나 퇴근 무렵 그의 손가락 끝은 '예쁘게 포장한 폰트'를 가리키고 있다. 겉보기에만 그럴듯한 '빛 좋은 개살구'말이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올려놔"

"네, 들어가세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퇴근하는 팀장에게 안녕을 고한다. 역시 점심이 부실했던 것일까,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휴대폰처럼 힘이 없다. 서류 보완과 수정 그리고 잔소리까지 오늘의 할 일을 끝내고 나니 집 생각이 간절해진다. 피곤이 허기를 억누르고 있다.

물기로 가득했던 우산도 빗물을 모두 털어냈다. 자신이 맡은 임무를 다했으니 제대로 정돈하여 다시 묶어준다. 마치 지팡이가 된 듯 우산으로 땅바닥을 찍으며 집으로 향한다.

샤워기를 틀고 오늘 쌓였던 스트레스를 몽땅 씻어내니 조금 개운해진다. 다 말리지도 못한 머리 위로 수건을 올려두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먹을만한 게 있나?'


숨이 죽어가던 그 찰나를 지나면 음식물 쓰레기로 변해버릴 상추와 지난 주말에 조금 무쳐두었던 시금치와 콩나물 무침이 보였다. 엄마의 손길이 가득 담긴 열무김치까지 꺼내본다. 10구짜리 달걀도 이제 딱 하나 남았다.


'에이, 비벼먹자!'


하부장에서 잠자고 있던 은빛 양푼을 꺼내 찬밥을 넣고 상추를 제일 먼저 잘라 넣었다. 시금치와 콩나물을 굳이 곱게 담아본다. 마지막 남은 줄기까지 덜어내니 영락없이 설거지 거리로 남는다. 싱크대에 대충 던져두고 엄마의 열무김치까지 얹는다. 고추장을 숟가락으로 덜어내고 그 위로 참기름을 적당히 부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달걀로 계란 후라이를 했다. 지글지글 거리며 툭툭 맛있는 소리를 뿜어낸다. 고작 양푼에 넣을 비빔밥인데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이다. 적당히 익은 계란후라이를 예쁘고 단정하게 올려두니 아주 그럴듯한 비빔밥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싸웠던 문서의 내용과 폰트의 형태는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자리한 양푼비빔밥은 안에 들어간 내용도 그 형태도 매우 중요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온 힘을 다해 비벼댔다. 하얀 밥알들이 고추장에 범벅이 되어 붉게 변한다. 온종일 눈 아프게 만들었던 한글 파일의 붉은색이 이제는 침샘 자극하는 아름다운 빛으로 변해버렸다. 축 늘어져있던 상추와 시금치 그리고 콩나물도 서로 한 몸으로 뒤섞여 자신의 마지막 힘을 뿜어낸다. 팀장의 잔소리, 매너리즘으로 가득했던 오늘 하루를 은색 숟가락으로 꾹꾹 누른다. 그리곤 크게 한입 넣는다. 아삭아삭 씹히는 열무가 오감을 자극한다. 거기에 참기름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잘근잘근 하루의 스트레스를 씹어 삼키니 아주 시원하다. 바닥이 뚫어질 듯 싹싹 긁어 점심에 채우지 못한 포만감을 가득가득 채워본다. 그렇게 하루 내내 쌓였던 피곤함을 덜어내고 기분 좋은 포만감으로 재충전했다.

그렇게 저녁을 마무리하고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엄마의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아까 보았던 걱정스러운 문자 뒤로 '연락 바랍니다'라는 문자가 올라왔다. 내가 열심히 밥을 비비는 동안 전화를 하셨던 모양이다.


"그래, 밥 먹었니?"

"네, 맛있게 먹었죠. 아주!"

"잘 먹고 다녀야지. 오늘 비도 와서 춥겠네"

"괜찮아요"

"반찬 다 떨어졌지? 뭐 시켜먹지 말고, 와서 반찬 좀 가져가. 시간 날 때"

"네, 안 그래도 오늘 다 먹었는데. 설거지 깨끗하게 해서 가져갈 테니 반찬 좀 싸주세요"

"그래, 뭐 먹었니?"

"비빔밥"


그렇게 살갑지 않은 자식이라 늘 투정만 부렸던 것 같은데 오늘은 반찬도 얻어낼 겸 어리광을 피워봤다. 컴컴한 저 하늘 위에 둥근달이 걸려있다. 내일 또다시 비워내고 덜어내고 다시 채우기를 반복하게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뒤엉켜 양푼 비빔밥처럼 하루를 뒤섞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니까 말이다. 그 일상을 채우는 것은 역시 맛있는 한 끼.

휴대폰에 케이블을 꽂아 충전을 시작한다. 나도 이불을 덮고 내일을 위한 충전을 시작해본다. 기분 좋은 내일이 다가와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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