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여행 되새김 #2
둘째 날 파리.
어제보다 더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을 지나 골목에서 대로변으로, 큰길에서 다시 좁은 길로 루브르(Louvre)가 있는 센 강(Seine River)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엔틱하고 클래식한 건물들이 주변을 둘러 런던에서 느꼈던 '진정한 유럽풍'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가고자 했던 루브르박물관은 파리 여행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관광명소일 것이다. 지구 상에 존재했던 과거의 흔적들을 수집해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이 곳.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은 침략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침략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여기저기서 익히 들은 바가 있는데 그리스, 이슬람, 이집트, 로마 등 각 나라의 역사 깊은 유물이 이 곳에 와있다는 것 자체가 이 문장이 만들어진 이유가 될 것이다.
1190년 요새에서 출발해, 16세기 중반에 왕궁으로 그리고 다시 1700년대 후반에 박물관으로 변모했고 당시 프랑스의 군인이었던 나폴레옹(Napoleon)에 의해 박물관 수집품이 점차 다양해졌다고 전해진다.
루브르 근처에 다다르자 루브르의 상징인 피라미드형 입구가 보였다.
'어라, 생각보다 사람이 없네?'
편하게 볼 수 있을까? 여기엔 원래 사람이 없나? 입구가 다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휴관이란다.
<매주 화요일 휴관>
난 왜 미처 알지 못했을까? 여행의 기본은 '정보'인데 당연하고 기본적인 정보를 놓쳐버렸다. 사실 2주간 여행 중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인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게 사실이다. 정보와 시간을 놓친 날 탓할 수밖에.
스케줄이 살짝 꼬이긴 했지만 급히 일정을 변경하기로 했다. 다음 날 가려고 했던 오르세미술관으로 대체.
오르세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은 센 강을 기준으로 위치가 나뉘어 있으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고 있다.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
오르세미술관(Orsay Museum)은 '미술관'으로서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건물이나 위치로만 따지면 대략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만큼 변화가 많았던 것이다.
1800년대 초반 최고재판소로 지어져 오르세 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화재로 소실, 1900년엔 오르세 역으로 변모했고 약 40년 뒤엔 폐역(廢驛)과 방치. 그리고 다시 1979년 리모델되어 1986년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밀레의 <이삭줍기>,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고흐의 <화가의 방>, 고갱의 <타이티의 여인들> 등 19세기 미술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이번엔 무사히(?) '관람'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고 난 미리 준비해둔 '뮤지엄패스(Museum Pass)' 라인을 통해 입장했다.
안쪽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품을 관람하고 있었다. 뛰어다니거나 시끄러운 모습 없이 모두가 진지하게 미술품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림 하나하나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화가의 손길이 담겨 있다는 걸 생각하니 뭔가 짜릿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떻게 이런 섬세함이?', '이 화가는 이 그림을 그렸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진을 담기보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게 가장 좋을 듯했다. 미술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말이다.
가볍게 그리고 천천히.
오르세미술관의 또 다른 매력은 둥글게 설계된 대형 홀 그리고 높이 설치되어 있는 오르세미술관의 상징, 시계다. 이 시계는 과거 기차역의 흔적이자 역사(History)다. 세밀한 조각마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파리의 발상지, 시테섬
미술관을 나와 세느강변을 걸었다. 센 강의 폭은 한강과 비교도 안될 만큼 좁다. 한강 위에 밤섬이 존재하듯 이 곳엔 시테(Cite) 섬이 존재한다. 폭은 183미터, 길이는 914미터.
이 작은 섬은 파리의 '발상지'로 알려져있다. 지명 자체가 '중심지' 또는 '발생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퐁네프(Pont Neuf) 다리가 이 섬을 지나고 있으며 파리의 원점인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이 이 섬 위에 자리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과 센 강의 조화로운 모습은 꽤 낭만적인 자태를 뽐낸다. 대부분의 다리(bridge)들이 그러하겠지만 파리의 예술, 낭만 그리고 역사가 센 강 다리와 함께 하고 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로 유명한 퐁네프 다리는 어원적으로 'Pont'는 '다리', 'Neuf'는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영화가 상영된 이후 '연인의 다리'로 불린다.
센 강과 퐁네프 다리의 조화로운 모습은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프랑스 여행 전에 들었던 '소매치기'나 '테러경보'라는 단어가 전혀 무색할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이래서 낭만적인 도시라 불리는 것일까? 그냥 천천히 여유롭게 만끽하고 싶다.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광장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장난을 치거나 사랑을 속삭이거나 뛰어다니는 등 정신이 없을 정도. 길게 늘어선 입장객 뒤를 따라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바깥 분위기와 달리 조용하고 아늑하며 진지한 모습들로 가득 채워진 이 공간 속에서 더욱 경건해졌다.
노트르담(Notre-Dame)은 프랑스어로 '우리의 귀부인' 즉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단어다.
그동안 많은 성당을 봐왔기 때문이었는지 큰 차이를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이 곳에 감춰진 역사는 그 어느 곳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12세기에 지어진 노트르담은 약 8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부서지기도 하고 개축이 되기도 했으며 일부는 복원이 되기도 했다.
위그노(Huguenot)라 불리는 개신교 신자들의 폭동과 함께 우상숭배라고 여겨진 대성당의 성상들이 있는 외관이 파괴되기도 했다.
루이 14세 이후 대성당의 현대화를 위해 개축이 되기도 했으며 프랑스혁명 때는 대성당의 보물들이 파괴되거나 사라지기도 했다. ※ 위키피디아 참조.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2차 대전 당시 독일에 의해 대성당의 아름다운 창문들이 모두 폭격을 당할만한 위험에 처해 창문을 분리시켜 놓았다가 2차 대전 종료 후 다시 복원하기도 했단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폴레옹 1세와 그의 아내였던 조세핀의 대관식이 이루어졌고 19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간 잔 다르크(Jeanne d'Arc)의 시성(諡聖)도 이루어졌다.
※ 시성(諡聖) : 가톨릭에서 죽은 자들의 탁월한 신앙과 성덕을 기리기 위해 교회가 이를 공식 인정해주는 것.
이 곳이 더욱 잘 알려진 것은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노트르담의 꼽추'일 것이다. 노트르담 철거 위기 속에서 쓰인 소설은 대성당의 전통을 일깨워주었고 사람들로 인해 '대성당 보호' 운동으로도 이어졌다고 한다.
알고 보면 상처가 많고 오랜 역사를 간직해온 곳이다. 그 때문인지 그렇게도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일부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고했습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