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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Nov 20. 2015

동티모르의 짧은 추억

동티모르 출장 에세이 #1

동티모르.

나에겐 굉장히 생소한 나라였다. '나라 이름 대기'를 해도 잘 안 나오는 나라는 아닐는지.

아프리카인가? 남미인가? 아니면 지중해?

출장 전까지만 해도 동티모르에 대한 정보가 사실상 전무한 수준이었는데 일정에 맞춰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그래 상록수부대 하니 살짝 생각이 나기도 한다. 

동티모르는 우리나라와 같이 동쪽과 서쪽이 나뉘어 "분단국가"로 존재하는 곳으로 호주와 인접하고 있는 나라였다. 

티모르의 지리적 위치. 출처 : 구글지도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을 하고 내전의 고통까지 겪은 그야말로 시련과 아픔 속에서 희망을 꿈꿔온 나라다.  2010년 박희순 주연의 영화 <맨발의 꿈>은 동티모르의 아이들에게 축구와 희망을 가르친 김신환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덕분에 보다 더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맨발의 꿈> 포스터

동티모르에서의 짧은 추억을 되감아보고자 한다. 

Rewind!


강추위 한국, 무더위 폭염 동티모르

인천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그 새벽엔 칼바람이 불었다. 

새벽 4시. 아직 잠에 취한 나. 

잠을 깨기 위해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하니 뭔가 더 추워진 듯했다. 

두터운 패딩을 입고 공항에 가기 위해 서둘렀다.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 공기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공항에 나와있는 일행들. 티켓을 받아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동티모르에서 10여 일간 타이트한 스케줄을 보내야 하니, 경유지인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살짝 긴장된 몸을 풀고자 했다. 사실 동티모르까지 가기 위해서는 1박은 거의 필수다.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6시간 후 싱가포르에 잠시 경유했고 싱가포르를 출발한 비행기는 다시 2시간 뒤 인도네시아 발리에 안착했다. 

딱히 정해진 바는 없으나 1박 2일간 휴양지의 맛을 "맛보기" 수준으로 느껴보고자 한 것. 

사실 "감질나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겠다. 

하지만 리조트에서 잠도 자 보고 바닷가도 둘러보고 리조트에서 전해주는 맛있는 식사들까지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이후의 스케줄이 어떤지 모른 채 말이다. 

여기에서 겪었던 모든 것이 앞으로 열흘간 동티모르에서는 절대 겪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인도네시아 발리 해리슨리조트
발리 공항에서

싱가포르 창이공항의 면세점이 "굉장히 작다"라는 정보를 듣긴 했으나 이 곳 발리나 티모르, 필리핀 등 동남아 휴양지 면세점에 비하면 그렇게 작은 편도 아니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면세점이 워낙 크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창이공항의 면세점을 보다 발리 공항의 면세점을 보니 버스 터미널의 매점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발리 시내에 가면, 우리나라 동화면세점이나 신라면세점과 같이 대형 면세점도 있으니 공항보다는 이 곳을 둘러보면 더 좋을 듯하다. 

동남아라면 늘 그렇듯 네 바퀴 달린 자동차보다 자전거, 오토바이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에메랄드빛 바다를 꿈꾸고 나가 본 발리의 앞바다는 "투명", "에메랄드"와 한참 거리가 멀었다. 

이래서 리조트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던 건가?

인도네시아 발리에는 고품격 리조트들이 많으니 제대로 알고 가면 좋을 듯하다. 


동티모르에 발을 내딛다.

발리에서의 짧은 시간을 끝내고 다시 동티모르로 향했다. 

발리에서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Dili) 공항까지는 메르파티 항공(Merpati Airlines)의 아주 작은 경비행기를 이용해야 한다. 이 항공은 인도네시아에서 운영한다. 

발리에서 딜리까지 이동하는 메르파티 항공


분명히 더운 날씨임에도 에어컨 상태가 좋지 않았던 비행기. 마치 관광버스를 타는 듯 비행기는 이리저리 흔들리기 일쑤였고 좁아터진 자리로 2시간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창문 밖만 멍하니 바라봤다. 

어느새 보이는 육지. 바로 티모르섬이었다. 


동티모르 딜리공항에서

이게 공항인가 할 정도로 매우 작고 소박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가 재빨리 우리의 몸을 휘감았다. 

작은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짐들, 저 작은 비행기에 어마어마한 짐들이 있었구나.

보기에도 왜소한 트럭 하나가 그 짐을 공항 밖으로 실어나른다. 

우리는 여권을 꺼내 실링팬이 힘겹게 돌아가는 동티모르 세관에서 공식적으로 입국 수속을 받게 된다. 험악하게 생긴 군인이 우리를 쳐다보고 입국 수속을 담당하는 직원이 몇 마디 하지 않은 채,  입국 승인을 위한 스탬프를 찍는다. 

강렬한 햇살에 행여나 데일까 세관 안쪽 그늘에서 짐이 나오길 기다렸다. 

딜리 공항 앞

그런데!

짐을 실어나르는 도중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온 빔프로젝터가 사라졌다. 

뒤늦게 이 곳 사람에게 들으니, 여기 일꾼들은 짐을 나르다가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한쪽으로 치워 본인들이 가져간단다. 너네 물건도 내 것, 내 물건도 너희 것. 마치 물건을 공유하는듯한 느낌. 물론 경우에 따라 사람에 따라 그런 거니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찾으려 해도 이미 시간낭비. 

결국 빔프로젝터는 포기. 스케줄을 위한 곳으로 이동했다. 

비포장도로를 덜컹덜컹, 뒤뚱뒤뚱 1시간을 넘게 달리고 목적지에 도착. 

척박한 땅, 동티모르의 흔한 풍경


정말이지 척박한 땅 위에 다 쓰러져가는 마을 회관이 있었다. 주변에는 풀이 아이들 키보다도 높이 자라났고 그 곳에서 마을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바로 그 마을회관이 우리가 숙식을 해결해야 할 숙소였다. 

바깥은 40도에 육박하지만 그나마 그늘로 들어오면 간간이 시원한 바람도 들어왔다. 


폐허로 변해버린 마을회관 2층

이 곳 역시도 내전의 충격으로 인해 일부는 폐허로 남아있었다. 


동티모르의 아픔

티모르섬은 동쪽과 서쪽이 분할되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때는 1859년.

이후 1956년 네덜란드로부터 식민지라는 꼬리표를 떼어낸 서티모르는 바로 인도네시아가 차지했다. 1975년 포르투갈이 동티모르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마저도 가져갔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자국의 27번째 주로 합병하기에 이르렀다.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오랜 식민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다시 인도네시아가 점령하자 독립을 요구했고 시위까지 진행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들에 대해 유혈탄압을 자행했다. 

방화로 모두 부서진 PKF 사령부


동티모르는 UN의 지지를 받으며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99년 1월 동티모르의 독립 여부를 주민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투표 결과 80%에 가까운 사람들이 "당연히" 찬성을 했지만 인도네시아는 결과에 불복했다.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들은 동티모르 전역에서 학살, 방화, 시설 파괴 등을 자행하며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 결과 1천5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 속으로 피신했다. 

UN은 다국적군을 통해 인도네시아 민병대를 공격, 동티모르 주민들을 보호하면서 평화유지 활동을 펼쳤고 그 결과 2002년 5월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대한민국 정부도 UN 평화 유지군으로 상록수부대를  파병한 바 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동티모르 주민들에게 새로운 마을회관과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그 장면들을 화면에 담아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것. 



내용이 조금 길어진 듯하여 2편으로 나누려 한다. 

이 글을  그때 당시 함께 했었던 누군가 보게 된다면, 마을회관 건립에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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