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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Nov 23. 2015

그래도 희망은 있다

동티모르 출장 에세이 #2


동티모르에는 크나큰 아픔이 있었다라는 사실은 앞서 1편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묘지는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더구나 묘지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웠다. 

산타크루즈 묘지

피해를 입은 유가족들이 이 곳을 찾는다면, 분노와 슬픔이 공존하게 될 듯하다. 

묘지 앞에서 자행된 인도네시아의 학살 그리고 바로 건너 편에 이렇게 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1991년 산타크루즈의 대학살로 피해를 입은 그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산타크루즈 묘지를 카메라에 담고 있는 여행객

사실 마을회관 재건립과 아이들을 위한 운동장은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 여러 명과 함께 하게 된 프로젝트였다. 

건설사 직원도 아니고 공사판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던 친구들도 있었기에 그렇게 화려하거나 호화스러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과거의 슬픔을 오늘의 희망으로 바꿔줄 수 있는 분명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마을의 아이들은 우리가 하는 일들을 저 멀리서 지켜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바라보기도 했다. 

신기할 법도 하다. 자신들과 전혀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이 단체로 몰려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뚝딱뚝딱" 무엇인가 만들고 있었으니, 경계심과 신기함 그리고 다소 황당한 느낌까지도 가졌을지 모르겠다. 

동티모르의 아이들
신기한듯 우리를 바라보던 동티모르의 아이들 

우리는 중간중간 폐허로 남아있거나 재건된 건물들을 둘러보기도 했다. 

내전으로 인해 부서진 건물들은 손을 대기 어려웠던 건물들도 있었고 더디게 공사 중이었던 건물들도 있었다. 

그저 평범하고 태연하게 그 앞을 지나가는 저들에게는 저 건물이 어떤 의미로 남을까?


마을회관 건립과 함께 중간중간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티모르 학생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도 가졌다.  

또 출장기간 중 하루는 동티모르의 한국대사관이 우리를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국대사관은 바닷가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었고 멋진 광경도 연출했다. 

여기에서 얻어먹은 "라면 한 그릇"은 정말 꿀맛 같았다.  

동티모르의 한국대사관에서 바라본 바닷가
물과 담배 그리고 군것질거리를 팔던 노점상

역시나 이 곳은 물이 필수다. 거리마다 팔고 있던 물은 미적지근했지만 어찌됐든 메말라있던 목구멍에 물을 투여하지 않으면 탈수 증세가 생길듯한 기분이다. 

이런 폭염의 느낌은 7월 군번인 나에게 유사한 경험을 하게 해줬다. 그래도 여기가 낫겠지만...

사실 군대라는 곳은 여름에 가면 더워 죽고 겨울에 가면 추워 죽는다. 그게 정말 기온차 때문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훈련병 때 느끼는 온도는 특별한 듯하다. 

이 곳의 온도는 39도는 기본, 40도를 넘나든다. 그나마 옷도 얇게 입고 왔지만 카메라와 귀중품이 들어있는 백팩과 메신저백 등 몸에 걸친게 너무나 많았기에 체감온도는 더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는 곳도 거의 없다. 그러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건 물 그리고  그늘뿐이다.

대사관에 우뚝 솟은 태극기

이 곳의 학생들 중 일부는 호주로 넘어가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우리와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던 몇몇 학생들도 호주에서 영어를 배워왔다. 

동티모르는 오랜 기간 동안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원주민이 쓰던 떼뚬어(tetum)와 함께 포르투갈어, 인도네시아어, 영어를 혼용하여 쓴다. 

마을에 있었던 주민들이 떼뚬어로 이야기하면 우리와 협조하여 일하던 학생들이 영어로, 그 영어는 필요에 따라 한국말로 통역하여 의사소통을 진행했었다. 

순박하기 그지 없는 학생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내전도 아픔도 없이 그저 흔한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동티모르는 영화 <맨발의 꿈>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한때 촉망받는 선수 김원광(박희순)은 동티모르에서 사기를 당하고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 축구공을 차며 놀던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이들에게 축구용품을 팔다가 결국 "축구팀"을 만들게 된다. 

그리곤 그들에게 꿈을 꿀 수 있도록 해준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어느 정도의 각색과 연출은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희망을 갖고 뛰어놀던 그 어린 학생들을 어느 운동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축구 실력이야 어찌 됐든 그들이 평범한 티셔츠가 아닌 축구 유니폼을 입고, 슬리퍼가 아닌 축구화를 신으며 공을 차는 모습들은 그저 아름다웠다.

당연히 김신환 감독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곳 아이들과 우리와 함께 방문한 대학생들과 친선 경기도 있었다. 아이들은 날렵했고 조직적인 패스를 통해 원활하게 경기를 이끌어갔다. 


아이들을 가르친 김신환 감독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와 예리하고 냉정한 눈빛이 공존했다. 

이 아이들이 보다 좋은 환경 속에서 축구를 하며 성장했다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동티모르의 축구팀은 2008년 호주 대륙에 속해있는 "쿡제도" 축구팀을 상대로 경기했고 첫 승리를 기록한 바 있다. 

동티모르의 유소년 축구단
티모르 유소년 축구단의 김신환 감독 명함


동티모르 방문 당시 

동티모르 대통령은 사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구스마오 대통령은 취임 전 교편을 잡기도 했고 시와 사설을 쓰는 시인과 기자로도 활동했던 경력이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략했을 때 구스마오는 독립투쟁을 했다. 

인도네시아와 맞서 싸우던 "팔린틸(Falintil)"은 무장독립조직으로 1975년 이후 약 50여 차례의 독립 시위를  주도했고 이후 팔린틸의 사령관을 맡게 되며 군사 조직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구스마오 대통령은 동티모르 독립의 주도적 역할을 했고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되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나라를 운영했다. 

구스마오 대통령의 아내, 커스티 스워드 구스마오는 호주 출신으로 동티모르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단체, 알로라 재단의 이사장이다. 

우리는 구스마오 대통령과 약 1시간 반 가량 인터뷰를 진행했다. 

처음 느낌은 이랬다. "질문은 짧은데 대답은 긴" 스타일. 편집 때 이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렵게 번역했던 기억이 난다. 

겉보기에도 독립투쟁을 했던 군인의 모습보다 정말 넉살 좋고 농담도 잘하는 수더분한 아저씨 같았다. 

올해 초 동티모르의 총리도 사임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어느 정도 세대교체가 필요한 때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오른쪽이 필자, 바로 옆이 사나나 구스마오 대통령

뭔가 친근해 보이지 않는 인증샷이지만, 인터뷰 내내 재미있었던 시간이었다. 

인터뷰는 구스마오 대통령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마을회관을 지으면서 필요한 물은 약  500미터쯤 떨어진 마을회관 앞바다에서 채워오기도 했다. 

물은 흐릿했다. 우리의 땀내 나는 몸을 시원하게 해줄 물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샤워시설이 없어 쉽게 뛰어들진 못했다. 

마을회관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바닷가

마을회관 공사 현장 뒤쪽으로 임시 화장실을 마련했고 그 옆으로 식수와 세수 용도로 물을 공급, 칸막이로 된 임시 샤워 시설을 만들긴 했다. 당연히 열악! 

밤 중에 샤워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됐든 마을 건립 완공식 당일날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했다. 

어디서부터 소식을 들었는지 그렇게 조용하던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 마치 마을 축제 같았다. 

마을 주민이 선사해준 음식들
마을회관 완공 당일 모인 사람들

과연 우리는 이들에게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마을회관 건립을 통해 잘 전달되었을까?

여러 학생들과 공사에 참여했던 인부들 모두 큰 사고 없이 완공까지 함께 할 수 있었다. 간혹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가뭄 속에 단비처럼 그 비는 시원함도 주었고 메마른 땅에 촉촉함도 선사했다. 

우리가 떠나는 마지막 날, 그들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훌쩍이며 그들과 쌓아왔던 "정"에 대한 앞으로의 "그리움"을 눈물로 표현했다. 

그들에게도 이러한 만남과 이별은 흔치 않은 일인데 그들은 미소로 이별했고 우리는 더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마음속에 남아 원치 않는 눈물로 이별했다. 


우린 모두가 녹초가 되었다. 

심지어 잘 씻지도 못하고 잘 먹지도 못했다. 

돌아가는 길,  발리에 들려 한국인 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제대로" 허기를 달래 주었다. 

새벽에 도착한 한국은 여전히 싸늘했지만 강추위는 살짝 풀린 듯하다. 

오늘 동티모르를 뜨겁게 비출 햇살이 이 곳에서는 그나마 따사롭게 느껴졌다. 


난 동티모르의 출장 전부터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약 4~5kg 가 빠졌다. 

타이트한 일정 속에서 내가 그 곳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했었던 모든 일들과 그들과의 만남이 그저 꿈만 같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후 동티모르의 학생들 몇몇이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물론 그땐 내가 없었지만 지금 그들의 안부를 묻고 싶다. 

잘 있는지, 건강한지. 과거의 아픔을 오늘의 희망으로 보다 힘차게 살아가기를 응원한다. 


동티모르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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