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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Aug 12. 2016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재난, 그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

내맘대로 리뷰 #26번째 영화 <터널>

※ 영화를 본 후, 제 느낌대로 써내려간 리뷰입니다. 가급적 스포일링이 되는 요소는 배제코자 했으나 간혹 포함될 수 있으니 이 글을 읽기 전에, 그리고 영화를 보시기 전이라면 더욱 참고 바랍니다. 

재난영화에 대한 짧은 전제

'재난영화(Disaster Film)'라 함은, 지진, 홍수, 화산 폭발 등의 천재지변부터 빌딩의 화재, 열차, 비행기 등의 대형사고 그리고 소행성 충돌에 이르기까지 인류에게 닥친 초대형 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의 한 장르를 일컫는다. 통상 이러한 재난은 한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을 피해자로 삼게 된다. 결국 '재난영화'도 공포물에서 파생된 장르이겠으나 스펙터클한 영상과 거대한 스케일로 무장한 할리우드판 재난영화가 블록버스터급으로 제작되면서 공포감보다는 오히려 다이내믹한 쾌감, 오싹함보다는 감동적인 드라마 요소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분명히 메시지는 담겨있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는 영화의 플롯에 오롯이 담겨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경우가 많다. '영화는 영화일 뿐.' 때론 나와는 관계없는 공상과학 영화일 것이고 때론 지극히 현실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공포감이 들기도 한다. 

쓰나미가 일어나고 지진으로 세상이 무너지는 자연재해와 부실공사나 인간의 간과(看過)로 인한 인재 속에서 우리는 당연히 공포감을 갖게 된다. 정말 무서운 건 그 재난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영화 <터널>은 터널에 갇힌 이정수(하정우)와 주변 인물들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터널에 갇혀버린 우리의 현실

자동차회사 딜러로 근무하는 정수(하정우)는 집으로 가던 중 터널에 들어선다. 이상한 소리가 나고 내부 조명이 꺼지면서 터널이 무너져 내렸고 그곳에 갇히게 된다. 깨어보니 주변에는 무너진 토사와 콘크리트의 잔해뿐. 딸의 생일을 위해 미리 사두었던 케이크와 생수 2병 그리고 78%가 남은 휴대폰이 그에겐 실낱 같은 희망이다. 구조대장 대경(오달수)과 겨우 통화를 하게 되고 구조를 기다리며 살 길을 찾는다. 정수는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

물병을 바라보는 정수(하정우)

터널이 붕괴되자마자 등장하는 건 언론이다. "대한민국의 안전이 또다시 무너졌습니다"라고 멘트 하는 앵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멘트가 아닐까? 전혀 낯설지 않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2년전 세월호 사건 등 전국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를 뉴스로 봐왔던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익숙한 멘트일 것이다. 특종에 목이 마른 언론들은 터널에 갇힌 이정수의 안위보다 이정수의 한 마디가 더 중요했다. 어떻게든 한번 더 찍고, 어떻게든 한번 더 목소리를 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한다. 

"하루만 더 버텼어도 기록일 텐데" 

하루빨리 나와도 모자랄 판에 하루만 더 갇혀있었다면 세간의 관심을 모을 수 있다고 말하는 기자. 영화 초반부터 엔딩까지 언론들은 정수의 상처와 아픔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의 모습을 찍고 텍스트를 붙여 기사로 내보내면 그만이다. 언론이 생산하는 기사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이 말하는 '생명에 대한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영화 속 언론의 행태는 그저 얄밉고 가증스럽다.

바리케이드 뒤로 모여든 취재진들

관객들을 분노케 하는 건 언론뿐이 아니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반드시 나타나는 무리들이 바로 '정부'다. 현장을 찾은 장관(김해숙)은 구조대에게 브리핑을 받는다. 

"여기 터널이 또 있어요?", "알아서 잘 협의하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고 수습을 위한 명확한 코멘트는 없다. 너무도 당연한 질문을 하고 뻔한 대답과 지시를 내린다. 정우의 아내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장관은 매뉴얼에 나와있는 듯한 표정과 행동을 보이고 보좌관 외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아주 당연한 의전을 받는다. 그리곤 사진 한 장을 남긴다. 결국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게 된 장관은 그간 우리나라 정부가 보여주었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사고 수습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뻔한 말 역시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적 체계의 허술한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장관(김해숙)     출처 : 영화 예고편 중

이들과 달리 구조대로서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 있다. 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

터널에 갇힌 이정수를 하루빨리 구하고픈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고 정수에게 나름 힘이 되는 존재가 되기도 하며 우왕좌왕하는 바깥 상황에서 관객이 그토록 바라던 대응방식을 펼치는 인물이다. 

"도롱뇽 하나 때문에 공사가 지연되고 그 때문에 경제적 손실이 너무나 컸습니다. 도롱뇽 하나 때문에요"

터널에 갇힌 한 사람을 구하고자 노력했던 시간 동안 바로 옆 하도 제 2 터널 공사가 지연되자 공청회에서 한 전문가(최귀화)가 내뱉은 말이다. 

"도롱뇽이라뇨?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 안에 갇혀있는 건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인데요? 도롱뇽이 아니라 사람이라고요"

단 한 명이지만 구조에 최선을 다하고자 수많은 장애물을 건너야만 하는 구조대장의 이 한 마디는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이자, 생명의 중요성을 내포한 가장 중요한 대사이기도 하다. 

정수를 구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구조대장 김대경

이처럼 영화는 우리 사회에 대한 처절한 단면과 가슴 아픈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이전에 기획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영화에 담긴 연출은 어쩌면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것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과 같은 기존의 국가 재난과 재난 대응 체계에 잘 대입해보면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무거운 메시지에 담아낸 위트와 재미

영화를 보면서 수차례 분노가 치밀었다. 언론의 카메라 세례와 말도 안되는 행태들, 정부가 재난을 바라보는 시각들은 얄미움을 넘어서 화가 날 정도의 분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웃음소리는 극장 안을 가득채웠다. 전반부는 속도감 있게 흘러갔다. 터널이라는 공간, 그것도 매몰된 차 안에 갇혀있는 정수 캐릭터를 보면서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시퀀스를 아주 재치 있게 담아냈다. 그 재치와 위트 그리고 재미가 감독이 생각한 메시지와 함께 제대로 전달될 수 있게 해준건 배우의 연기가 큰 몫을 한다. 하정우가 극 중에서 언급한 대사들이나 표현 모두 흠잡을 데가 없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연기했던 척 놀랜드와 끝까지 말 한마디 없는 배구공 윌슨과의 대화에서 우린 은근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정수가 우연하게 터널에서 만난 강아지와 대화를 하는 장면들 역시 그와 비슷하다. 구조대장, 배두나가 연기한 정수의 아내 세현, 강아지 탱이, 라디오에 이르기까지 이정수와 연결되는 캐릭터 모두 제 자리에서 제 몫을 한다. 특히나 강아지 탱이는 이 영화의 특급 조연이다. 정수의 아내는 세현이지만 강아지 탱이와 함께 했던 고난 속 케미는 '베스트 커플상'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극 중에서 뿜어져나오는 위트는 이 영화를 재난 장르가 아닌 풍자 영화 그리고 블랙 코미디라는 프레임에 담아내 깨알 같은 재미와 웃음, 무게감 있는 메시지를 균형감 있게 전해준다. 


통상 인류를 대상으로 한 재난영화가 이렇게 한 사람에 집중된 재난으로 표현되니 정수라는 캐릭터에 더욱 감정이입되었다. 살벌하게 무너지는 터널과 그 안에 갇힌 정수를 보니 본래 있지도 않았던 폐쇄공포증이 생겨나는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연 정수와 같은 농담이 나올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수가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내뱉은 태연하기 그지 없는 위트는 '난 꼭 살아남을 수 있어'라는 희망적인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김성훈 감독의 전작 <끝까지 간다>에서 보여주었던 긴장감과 재미는 <터널>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발휘되었다. 정부나 언론이 이 영화를 본 뒤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지 궁금해진다. 



앞서 언급했듯, 스포일링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황병국 감독님 주유소 씬 잘 봤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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