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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품새가 뭐라고

아이의 인생 첫 시험

by Pen 잡은 루이스

브런치의 10주년 전시회가 있던 날은 깜짝 놀랄 정도로 쾌청한 것이 날씨가 너무 좋았더랬다. 그냥 가만히 서서 하늘만 바라봐도 정화되는 듯 맑았으니 그냥 회사에 틀어박혀 일하고 있는 게 죄스러울 정도였단 말이다. 그날 기분 좋게 퇴근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하교 후 소파에 앉아있던 아이는 세상이 무너진 듯 어두운 표정이었다. 평소 신나게 즐겨하던 로블록스에서 아이템이라도 잃어버린 건가? 차라리 그랬으면 나았을 뻔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좀 있으면 품새 심사 하는데 잘 안돼"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날씨도 좋고 전시회도 좋다며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고 히히덕 거렸으니. 다른 게 아니라 국기원 품새 심사를 앞두고 태권도 학원에서 특강을 하는데 꽤 허덕인다고 했다. 몸치라고 생각하는 나도 어떤 동작 하나 외우기가 어려울 지경인데 태극 1장부터 8장까지 길다면 긴 품새를 달달 외워야 하는 건 물론이요, 태권도 학원의 좁은 매트를 벗어나 광활하게 느껴질 법한 국기원에서 중차대한 국가고시라도 치르는 듯 하니 이래저래 부담감이 엄청난 모양이었다. 태권도 국가대표를 만들어보겠다는 어떤 거창한 포부 따위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 아이를 이렇게나 괴롭히고 있는 건가. 사실 태권도 학원인지 돌봄센터인지 모를 정도이거늘 그깟 품새가 뭐라고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유튜브를 틀어놓고 엄마 아빠가 츄리닝 바람으로 달밤에 체조하듯 아이와 함께 품새 동작을 시연했다. 그걸 굳이 또 영상으로 찍어놓고 보니 세상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다. 그제야 아이도 웃기 시작했다. 하긴 누가 봐도 웃긴 모습이었는데 이걸 대놓고 공개할 수 없으니 판도라의 상자 속에 처박아두고 묻어둬야 할 판이다. 그 와중에도 잠옷 입은 아이의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부모에게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아이에게는 인생의 '첫 테스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뒤늦게 알았지만 특강 시간 동안 관장님의 호통과 다그침이 1시간 내내 이어졌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부담감과 공포와 피로가 범벅이 되어 아이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은 듯했다. 땀이 범벅이 되어 집에 돌아온 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너무 어려워"

혼이 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아이는 배고픔도 꾹 참고 도저히 외워지지 않는 동작을 꾸역꾸역 해내고 있었으리라.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해서 후딱 끓여주긴 했다만 눈물 젖은 라면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 다음날 태권도장 엘리베이터에서 관장님을 만났는데 "아니 아이들한테 호통 좀 치지 마세요!"..라고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어색한 웃음과 눈빛을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아무리 돌봄센터 같은 태권도장이어도 정해진 시간 동안 우리 아이가 있어야 할 필수코스이니 지금 이 고통과 부담도 부모와 아이가 함께 감내해야 하는 법. 그래,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깟 심사 떨어져도 되니까 그냥 편하게 해"라고는 하지만 정작 편히 할 수 없는 아이에게 이런 말이 어떤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하긴 지금은 위로보다 응원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위로는 정말 심사에서 떨어졌을 때나 필요한 것. (사실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관장님의 호통보다 잘했다는 한마디의 칭찬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오은영 박사가 태권도도 가르치면서 아이도 달래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어쩔 수가 없다. 일단 버텨내야 할 수밖에. 매일 같이 눈물 흘리고 땀을 쏟아내도 결국 오롯이 아이 홀로 발차기를 하고 주먹 내지르기를 해야 하니 온 동네 떠나갈 듯 손뼉 치며 응원할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에도 유튜브를 보면서 생쇼를 좀 해야겠다.


조만간 이 공간에 "우리 아이가 품새 심사에 붙었어요"라며 대놓고 자랑하며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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