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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잡은 루이스 Nov 08. 2016

평범했지만 몽환적이었던 어느 봄날의 꿈

내맘대로 리뷰 #30번째 영화, 장률 감독의 <춘몽>

아마 이 영화를 봤다고 하면 지인들은 똑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어떠한 영화든 그 질문은 같다. 

"어때? 재미있어? 볼만해?"

글쎄, 딱히 재미있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충분히 볼만한 영화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기억에 남는 몽환적인 느낌이 싸늘해진 이 날씨에 아이러니하게 어울리는 '춘몽' 같은 묘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 아래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링 요소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흑백영화를 본 것이 얼마만인가? 흑색과 백색 그리고 회색빛이 선사하는 묘한 느낌은 3D나 IMAX에서 볼법한 스펙터클하고 다이내믹하며 컬러풀한 느낌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장률 감독이 연출한 이번 작품 <춘몽>은 그에게 있어 첫 흑백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다 보면 흑백에 대한 느낌보다 주인공 네 사람을 통해 표현되는 그 모든 것들에 집중을 하게 된다. '춘몽(春夢)'. 말 그대로 봄날의 꿈을 의미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 '꿈'이라는 것에 여러 의미가 부여된 듯하다. 세 남자 그리고 그녀가 꾸고 있는 '춘몽'의 의미란?

<경주>와 <춘몽>

이 작품은 장률 감독의 전작인 <경주>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컬러와 흑백의 차이만 있을 뿐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표현된 건 장률 감독만의 독특한 연출기법으로서 예나 지금이나 큰 변함이 없었다. 

찻집 앞에 서있는 최현과 윤희. 영화 <경주>

북경대 교수 최현(박해일)은 친한 형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경주로 내려간다. 7년 전에 보았던 어느 찻집의 '춘화(春畵)'를 찾는 최현. 그리고 그를 수상하게 바라보는 찻집 주인 윤희(신민아). 경주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묘한 감정들과 로맨틱하면서도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삶과 죽음, 환상과 현실의 경계. <춘몽> 역시 이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어느 한 공장에서 1년간 일했지만 월급 한 푼 제대로 받지 못한 정범(박정범)은 공장 앞에서 연신 꾸벅거린다. 하지만 고용주였던 사장(김의성)은 그를 무시하기 일쑤다.

"이렇게 해봐야 소용없어. 그냥 돌아가! 그래 한 1년 해봐라."

정범은 그저 꾸벅거릴 뿐 말이 없다. "떼어간 월급 주세요"라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날티 제대로 나는 동네 건달 익준(양익준)과 어리바리한 집주인 아들 종빈(윤종빈)은 정범과 늘 뭉쳐 다닌다. 똑같은 옷, 똑같은 모습과 똑같은 말투이지만 그런 모습이 싫지 않은 예리(한예리)는 그들을 반긴다. 그렇게 넷이 되었다. 집 앞에 마련된 고향 주막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딱히 득 될 것 없는 이야기들을 한다. 그것이 그들만의 안주거리. 

고향주막에서 여느 때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네 사람

정범은 고향이 북한인 탈북자이고 예리는 조선족 출신으로 중국에서 살았다. 익준은 고아원 출신이다. 간혹 그곳을 그리워하거나 추억하고 있지만 때로는 기억하기 싫은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 속 배경이었던 은평구 수색동의 비루하고 너절한 골목의 모습들은 마치 그들과 '맞춤옷'인듯한 느낌을 선사해준다. 넘지 못할 어느 선인 듯, 눈 앞에 펼쳐진 상암동의 거대하고 반듯한 건물들을 보며 신나게 욕을 날린다. 이들 역시 서울 시내에 살고 있으면서 도심과 동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이들에게는 분명히 낯선 공간일 수 있겠다. 

참고로 이 영화를 연출했던 장률 감독은 중국 옌지에서 태어나 연변대학을 졸업한 재중동포 출신이다. 중국에서 살았던 만큼 그 정체성을 영화에 많이 입혀내는 듯하다. 

<풍경>이 그랬고 <경주>가 그랬으며 <춘몽>이 그러하다. 


꿈인지, 현실인지


예리는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 그나마 세 남자가 예리를 돕는다. 쉽게 말도 못 하고 휠체어에 의지할 뿐 걷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몸을 예리가 홀로 씻기고 힘들게 기저귀를 갈아준다. 그리고 어느 날 예리는 꿈을 꾼다. 아무도 없는 휠체어가 가파른 경사로에서 홀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꿈. 아버지는 어디 있을까? 잠에서 깨어 아버지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한다. 다음 날 예리는 동네 슈퍼 옆에 자그마한 점집을 찾아 점쟁이(강산에)와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나, 좀 어떨까요?"

"음, 아버지는 오래 사시겠네."

"그럼 저는요? 저는 어때요?"

한참 말이 없다가 "..... 아버지는 오래 사시겠어."

이 짧은 대화를 통해 관객들이 예리의 죽음을 예견할 수 있도록 아주 쉽게 복선을 깔았다. 예리 역시 눈치챘을 것이다. 결국 '춘몽'이라는 따뜻한 느낌 속에서 장률 감독은 다시 한번 '죽음'이라는 어두움을 영화에 깔았다.


집으로 가던 중, 밖에 내다놓은 옷장에서 할머니 하나가 툭 튀어나온다. 

"할머니, 왜 거기서 나오세요?"

"그냥 여기서 기도했어"

 어느 날, 익준이 그 곳을 지나다 옷장에서 툭 튀어나온 예리를 보고 흠칫 놀란다.

"야 너 왜 거기서 나와"

"응 여기서 기도했어"

밀폐된 공간 속에서 기도했다라는 말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나이든 할머니나 예리를 보니 '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익준의 재기 발랄한 농담과 어리바리한 종빈을 필두로 하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꿈인 듯 아닌듯한 느낌은 영화의 각 시퀀스에 교묘히 집어넣어 자연스러운 디졸브(dissolve)처럼 연결했다. 


1. 상암동을 바라보며 낮술을 먹는 네 사람. 어느 순간 예리가 묘한 춤사위를 펼친다. 돌고 또 돈다. 예리의 시점에서 어지럽게 돌고 도는 중 같이 술을 먹던 세 남자가 사라진다.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나타나는 시퀀스에 배우들의 크레디트가 뜬다. 오프닝 시퀀스라고 하기엔 꽤 지나온 셈인데 함께 맞물리다 보니 '환상'인 듯 '현실'인 듯 몽환적인 느낌을 선보인다. 


2. 또 다른 날, 세 남자가 예리 앞에 앉아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다. 

"예리 너 얘랑 잤어? 얘랑도 잤고?"

익준은 어린아이처럼 토라진 말투로 쏘아붙인다. 

"응. 그리고 아저씨랑도 잤지.... 꿈에서"

결국 세 남자와 잤다고 한다. '꿈'에서. 관객들은 서서히 헷갈리기 시작한다. 예리의 아버지가 앉아있지 않은 텅 빈 휠체어가 경사로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나 예리가 세 남자와 잤다는 이야기나 꿈과 현실의 경계가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현실과 꿈의 시퀀스를 잘 어우러지게 배치하고 나면 꿈이었던 순간이 진짜 현실인 듯 보이는 장면이 다시 한번 튀어나온다. 


3. 예리가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가죽점퍼를 입고 오토바이 위에 앉은 남자(유연석). 이 남자가 고향 주막을 찾아오는 장면 또한 꿈처럼 다가온다.

"맥주 있어요?" 말없이 맥주를 건네는 예리. 

"혹시 음악 좀 들을 수 있나요?"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의 음악을 켜두는 예리. 

곧이어 그 음악과 함께 또다시 춤을 춘다. 곧이어 보이는 예리의 영정사진.  이 역시도 예리의 이상형과 마주하는 '꿈'일 수도 있겠다. 


4. 온종일 흑백으로 뒤덮었던 영상들이 예리의 죽음과 함께 컬러풀하게 변한다. 예리는 가고 없다. 세 남자는 그대로다. 고향 주막도 그대로다. 

휠체어와 함께 했던 예리의 아버지는 어느 순간 멀쩡하게 일어나 두 발로 걸어간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딸을 찾아가듯이. 

예리는 상암동에 위치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자주 영화를 보는듯하다. 어느 날 수색동과 상암동을 잇는 지하로를 네 사람이 함께 걷는다. 지하로가 주는 느낌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통로처럼 보인다. 


그리고 네 사람이 함께 영화를 본다. 예리와 정범은 조용히 스크린을 바라보고 종빈은 숙면을 취하고 있다. 반면 익준은 조용한 극장 안에서 불만을 토로한다. 

"이게 재미있어? 10분내내 계란 껍데기만 까고 자빠졌네"

몇 분이 지나자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장면일법한 어느 순간 익준 홀로 박장대소를 한다. 

"야 저거 너무 웃긴다! 하하하"


그들이 영화를 바라보는 느낌은 이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또 어느 면에서는 익준의 모습처럼 욕을 해대다가도 박장대소하거나 정범처럼 진지하게 바라볼 수도. 되뇌일수록 그 느낌이 은근히 따뜻하다. 봄날의 기운처럼. 

 


※ 영화에 대한 스포일링 요소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 11월입니다.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네요. 낙엽이 떨어지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지금 이 날씨에 봄볕 내리쬐는 영화 속 수색동의 공간과 그들이 꿈꾸는 '춘몽'이 묘하게 어울리는듯한 느낌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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