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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 May 12. 2020

역설이 만들어내는 인생의 묘미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북리뷰

개인적으로 과작(寡作)의 작가들을 좋아한다. ‘가뭄에 콩 나듯’ 작품을 내놓는 까닭에 그들의 작품은 쉽게 읽히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촘촘한 플롯과 서사, 주제의식에 심혈을 기울인 작가의 노고만큼, 보다 꼼꼼히, 뒤적뒤적, 갸우뚱하며 반복해 읽는 과정에서 독자는 지적 유희를 만끽할 수 있다. 소위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떠올려 보면 알 만한 일들이다.


각설하고, 테드 창 역시 (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을 사서 소장하기에 아깝지 않은 작가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단편집은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듯하지만 작품 전반을 흐르는 저변에는 테드 창 자신이 ‘인생’을 바라보는 독특한 사유가 담겨 있다. 극단적 모순을 통해 드러나는 역설, 패러독스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런 사유는 독자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지상에서 하늘의 끝에 이르면 또 다른 지상의 시작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처음과 끝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원통형 인장의 어디쯤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지식의 한계와 깨달음을 담은 <바빌론의 탑>, 강화된 지능 천재들의 극한 배틀 <이해>에서는 지능을 수단으로 보는 ‘레이놀즈’와 지능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보는 ‘그레코’ 사이의 팽팽한 접전을 통해 모순의 지양이 성립된다. 세계에 대한 가장 명징하고 논리적인 해석인 수학, 추상적 세계의 1인자 수학 역시 물리적 존재로부터 유리된 순간 스스로 모순을 내포하게 된다는 것, 자기모순을 내포한 이론이 너무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 수학자들은 혐오감에 빠질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르네’가 오류 없이 1=2를 증명해 내는 동안 그녀는 생과 사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영으로 나누면>)


빛이 수면에서 각도를 틀어버리는 것은 굴절률이 달라져서일까, 최단 시간을 위해서일까. 이 두 언술은 곧 인과론과 목적론을 대표하며 그 어떤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인식의 차이는 세계관의 차이와 언어의 형성, 시간의 이해 자체를 뒤틀어버릴 수 있는 엄청난 괴력을 발휘한다. (<네 인생의 이야기>), 명명을 통해 출생과 삶을 통제해 나갈 수 있다는 흥미로운 발상의 <일흔 두 글자>에서는 카발라학자의 죽음으로부터 우연히 습득한 히브리어 문서를 통해 세대의 영원한 지속을 위한 재귀형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재귀(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옴)를 통해 세대가 지속되는 것이다.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 닐은 살아 있는 동안 신의 사랑을 갈구한 적 없었지만 신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된 지옥 즉, 신의 부재 속에서 신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그 원리를 파악하고자 하지만 그 누구도 이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세상이 이해하기 어렵고 삶이 고된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테드 창은 삶의 구석구석에 담긴 역설의 작동 원리에 주목함으로써 소설의 묘미와 함께 삶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의 사유는 그에게 흥미로운 소재들이었을 종교(<바빌론의 탑>, <지옥은 신의 부재>), 언어(<이해>, <네 인생의 이야기>, <일흔 두 글자>), 수학(<0으로 나누면>, <네 인생의 이야기> 등을 매개로 구현된다.


내게 이 단편집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코 <네 인생의 이야기>이다. 언어인류학의 꾸준한 화두였던 ‘언어’와 ‘사고’의 관계가 드라마틱하면서도 논리와 철학을 통해 흥미롭게 전개된다. 헵타포드의 문자언어 속에 내포된 세계관, 시간에 대한 인식차이로부터 빚어지는 자유의지의 여부, 그리하여 주어진 인생에 대한 삶의 태도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정보 전달이 아닌 수행을 위한 선언으로서 존재하는 또다른 언어의 세계, 그리고 새로운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이전의 세계관까지 송두리째 뒤흔들릴 수 있다는 발상..... 소설의 서술이 시간 교차를 통해 이어진 까닭 역시 이미 헵타포드의 언어와 세계관을 습득한 ‘나(루이즈)’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책은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카프카의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한 작품집이라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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